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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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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고대 역사유적지 안양(安陽)의 은허박물관을 답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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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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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 시(成都市) # 거마갱 # 은허박물관 # 정저우시 # 중국 안양시 # 화동페리호
【역사】
(2020.07.04. 13:07) 
◈ 중국의 고대 역사유적지 안양(安陽)의 은허박물관을 답사하다
[스카이데일리 연재] 은상(殷商) 시기 중심지를 가다
고향 친구 중에 중국 청도에서 17년간 회사 대표를 역임했던 박종규 사장의 제안으로 5박 6일간 중국 답사 여행을 가기로 하였다. 먼저 중원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은상(殷商) 시기의 중심지인 정주(郑州)시와 안양(安陽)시를 중심으로 일정을 짜기로 하였다.
 
답사 시기는 2016년 10월 5일~10일로 잡았으며, 답사 장소는 안양 - 정주 - 태산 - 곡부 - 맹부 - 제남 - 청도로 잡았다. 인천항에서 화동페리호를 이용하여 2박은 배에서 하기로 하였다. 중국에서의 승용차 이용은 박 사장이 근무했던 회사의 차와 운전사인 왕(王)기사 섭외가 이미 된 상태였다.
 
우리 일행은 10월 1일 오후 5시에 인천항의 화동페리호에 승선하여 밤사이 황해를 건너 다음날 7시에 위해시 석도 항에 도착하였다. 석도항의 북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자리 잡아 화강암의 흰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9시경에 하선하니 기다리던 왕 기사가 반겨주었다. 승용차를 타고 부근의 슈퍼마켓으로 가서 생수 등을 구입한 후 ‘산동고속도로’로 진입하니 10시가 넘었다. 오늘의 일정은 가능한 안양까지는 도착해야 하니 갈 길이 멀었다.
 
고속도로는 중국의 평원지대를 통과하는 까닭인지 높은 고개나 산악지대는 보이지 않는다. 승용차는 거의 평지를 달리는 모습이다. 세 번이나 휴게소에 들려 짧은 휴식을 취하곤 달리기만 하였다. 점심도 오후 3시 경에 먹었다. 4시 경에 가벼운 비방울이 떨어진다. 위해에서 한단까지의 거리는 부산에서 평양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적어도 9시간은 소요될 모양이다. 7시경에 휴게소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고 출발하니 한단에 9시경에 도착하였다. 창밖에는 내리는 던 비가 제법 그친 상태다. 겨우 호텔을 찾아 숙박하니 10시가 가깝다. 모두들 피곤한 모습이 역력하다.
 
이튿날 아침을 호텔에서 먹고 8시에 출발하였다. 오는 비는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다. 우선 한단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안양을 향해 승용차는 출발하였다. 한 시간 정도 지나서 안양에 도착하여 은허(殷墟)박물관으로 향했다. 은허박물관은 야외 박물관이다. 대략 크기가 10만평이 되어 보인다.
 
박물관 건물 앞에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이 위치하고 있다. ‘사모무(司母戊)’는 제우(帝禹)의 정실 왕비이다. 둘째 왕비는 ‘사모신(司母辛)’이다. 제우(帝禹) 시기의 수도는 이곳 안양이다. 사모무방정은 1939년 안양 무관촌에서 발굴되었으며, 사모신방정은 안양 부호(婦好)묘에서 출토되었다. 사모신방정의 형태는 사모무방정과 비슷하나 크기는 사모무방정의 3분의 2 정도로 다소 작은 편이다.
 
안양 부호묘에서 출토된 ‘부이방정(阜夷方鼎)’에는 좌에는 사모무가, 우에는 사모신이 위치하고 중앙에는 부이(阜夷)가 위치하고 있다. 부이는 하우(夏禹)인 제우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우는 좌우에 사모무와 사모신을 배치시킨 것이 부이방정이다.
 
그런데 중국 학계에선 사모무와 사모신을 모두 상왕(商王) 무정(武丁)의 배우자 중의 한 명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중국학계의 청동기 주조 비정의 오류는 ‘고사부정론’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상(商)의 22대 왕 무정은 중국고고학계가 2000년 공표한 ‘하상주 연표’에 의하면 서기전 1250년에 태어나서 1192년에 사망한 인물이다. 따라서 중국학계는 사모무방정과 사모신방정의 주조 시기를 13세기 후기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사모우·사모신방정의 실제 주조 시기는 제우의 즉위년인 서기전 2311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청동기 제기에 이름을 새긴 명씨이기(命氏彛器)의 제작은 최고 통치자인 제왕(帝王)이거나 왕자나 왕녀, 왕비 등 왕정(王廷)귀족이라야 가능하다. 따라서 사모무·사모신방정의 실제 주조 시기는 서기전 24세기 초기임이 확실하다.
 
이와 같이 현 중국학계의 청동기 주조 시기의 비정 연대가 실제 주조 시기보다 천년이나 차이가 나는 등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현 중국 학계는 고사부정론자들의 후예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허박물관은 물론 현 중국학계는 모든 상(商) 이전 출토 청동기에 대한 비정을 상 초기로 한정하고 있다. 중국 학계가 이와 같이 역사적 현장을 왜곡시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해가 되지 않은 사건이다.
 
우리 일행은 거마갱(車馬坑)을 관람하였다. 20여 개가 넘는 마차들과 말들의 시신 뼈가 보존된 거대한 거마갱 역시 서기전 2297년 제우의 아들인 하계(夏啓)가 쿠데타를 일으켜 남긴 현장의 하나였다. 아버지 제우의 제삿날에 참여하기 위해 곡부에서 온 어머니인 사모무, 매형인 제익(帝益)과 귀족 및 병사들을 살해해버린 현장은 야외 광장에 유리로 덮인 채 전시되고 있었다.
 
남편 제우의 제삿날에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모무, 그의 사위 제익과 귀족들이 타고 온 거대한 마차는 곡부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 은허에 묻히고 말았다. 호위병으로 따라온 수많은 어린 병사들 역시 살해당해 은허에 묻히고 말았는데 이런 현장을 “은허궁전종묘제사갱유적(殷墟宮殿宗廟祭祀坑遺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한 병사들의 시신을 묻은 곳에 “북조종묘제사갱(北組宗廟祭祀坑)”이라 명칭을 붙이고 은인(殷人)들이 조상에게 전례(典禮)에 따라 제사를 지낸 유적이며, 노예제 사회의 잔혹한 살순(殺殉)제도를 형상화한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부이방정이 발견된 부호묘도 관람하였다. 묘의 깊이도 깊고 규모가 엄청난 지하 무덤이다. 역대 왕과 귀족의 무덤은 다르게 구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길거리에는 가는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은허박물관을 나와서 문자(文字)박물관을 향해 가던 중에 우회전하려다가 그만 다른 차와 접촉사고를 내고 말았다. 중국 경찰관이 오고 사고경위서를 작성하였으며, 보험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세 시간을 기다렸다. 오후 다섯 시 경에 해결될 것이라는 소식에, 우리는 우선 문자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박물관으로 향했다.
 
문자박물관 입구에는 한자의 자(字)를 크게 형상화한 건축물이 25미터 높이로 서있었다. 박물관 건물도 최근에 지은 모양이다. 5층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며 문자의 시작인 도편문자부터, 갑골문 - 금문 - 전서 - 예서 - 해서 - 행서 - 초서 순으로 배열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문자박물관에서도 금문(金文)보다 갑골문을 앞세우고 있다. 왜곡의 현장인 셈이다.
 
낙빈기의 『금문신고(金文新考)』는 금문이 갑골문보다 천년 정도 앞선 문자임을 증명하였다. 또한 신농(神農)계가 동방문자(漢字)를 만들었으며, 후대 황제계의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이 사실을 왜곡시켜 황제의 사관인 창힐(蒼頡)이 새 발자국을 보고 최초로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창힐 역시 동이인(東夷人)이었다는 사실까지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낙빈기의 주장을 부정하는 중국학계의 억지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물관 마감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기에 빠르게 보려고 하였다. ‘정주상성유지(鄭州商城遺址)’, ‘갑골문’, ‘족씨명칭(族氏名稱)’을 ‘족씨명호(族氏名號)’라고 부르며 갑골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고금문(古金文)’의 형태로 기술하였다. 족씨명칭은 은상시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서기전 25세기 전후부터 나타나기 때문에 갑골문이 아닌 고금문의 형태를 나타난다. 이곳도 문자 왜곡의 현장이었다.
 
오후 5시가 지나서 문자박물관 앞에서 일행 모두가 모였다. 승용차 보험 문제가 해결되어 다시 찾은 승용차를 타고 태산(泰山)을 향해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점심도 굶은 채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나니 오후 9시였다. 3시간을 더 운전한 후 겨우 12시 경에 태산 아래 호텔에 숙박할 수 있었다.
청두 시(成都市) # 거마갱 # 은허박물관 # 정저우시 # 중국 안양시 # 화동페리호
【역사】 이일걸(蘇山)의 우리 땅 간도 대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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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이일걸 한국간도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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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