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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高陽市) 행주 산성(幸州山城)
【여행】
(2017.11.20. 09:56) 
◈ 행주산성. 그리고 권율장군을 보다 (2015.5.8)
국립 중앙 도서관의 누정답사중에서 행주산성을 소개합니다.
행주산성을 방문하기 앞서 정조때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의 행호관어(杏湖觀漁)를 보면 행주산성 아래로 흐르는 한강(행호)에서 물고기를 잡는 모습이란 뜻으로 행주산성의 풍광이 잘 나타나고 있으며 그림속 정자는 귀래정(歸來亭), 낙건정(樂健亭), 장밀헌(藏密軒)으로 보이며, 공식적으로는 행주(幸州)라고 표기하지만 행은 행(幸)이나 행(杏,) 등으로 표기하고 모래 톱을 강조할때는 주(洲)라고 적을 때도 많습니다. 행호의 황복어와 웅어가 유명합니다.
 
 

 
杏洲書院이란 글씨가 보입니다.
 
 
덕양산 행주산성(높이 125m)은 임진왜란(1592)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으로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험한 절벽을 이용하면서 펼쳐지는 넓은 평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전기의 산성 형식과 같습니다.
 
성은 동서로 약간 긴 형태로 1㎞ 가량의 테뫼식 산성으로 산꼭대기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내성과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의 2중구조를 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동남쪽으로는 창릉천이 산성을 에워싸고 돌아, 자연적으로 성을 방어하는 구실을 하고 있어서 이 지역은 삼국시대 초기에 백제의 땅이었으며, 서해안과 연결된 수로의 거점지역으로 남북 교통의 요충지대입니다.
 
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의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많이 나오고, 물고기뼈무늬를 새긴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서 고려시대까지도 사용해 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1593년(선조 26)에 왜병과의 전투( 2300명과 일본군 3만명)에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라 병사들에게 공급해 줌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어서 당시 부녀자들의 공을 기리는 뜻에서 행주라는 지명을 따서 ‘행주치마’라고 하였다고도 합니다.
 
이 산성은 한강 유역에 있는 다른 산성들과 함께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방어요새의 역할을 한 곳으로,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가 있으며, 권율 장군을 모시는 충장사가 있습니다.
 
 
2015.5.2일은 마침 행주 문화제 행사날 이었습니다.
 
 
수문장이 보입니다.
 
 
 
평화기원 굿
 
 
권율장군 동상
 
 
올라가는 길 우측으로 방화대교
 
 
덕양정
 
 
 
 
행주대첩비
 
 
 
 
 

 
●권율(權慄)
 
 
1537년(중종 32)∼1599년(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으로 강화도 출생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며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입니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고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으며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고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습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으로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장(主將)인 이광은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고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습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워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고 그 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습니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行在所,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멀리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別宮)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는데 대병(大兵)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나기에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습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助防將,주장主將을 도와서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 장수)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고 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했으며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 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 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해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고,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고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입니다. 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습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습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고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습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습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享祀)지내며 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하고 시호는 충장(忠莊)입니다.
 
 
 

 
자유로, 한강이보입니다.
 
 
강서구 궁산
 
 

 
★ 행주 기씨(幸州 奇氏)는 경기도 고양시 행주동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며 TV 방송된 원나라 기황후와 권문세족 기철, 조선시대 기대승, 그리고 양궁선수 기보배, 축구선수 기성용 집안입니다.
 
★ 주변에 일산 호수공원이 있습니다.
고양시(高陽市) 행주 산성(幸州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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