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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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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구(銅雀區) # 사육신 공원
【여행】
(2017.11.29. 11:15) 
◈ 사육신 (死六臣)공원 둘러보기 -전편- (2015. 9. 8)
지난주 수십 년 전에 다녀온 서울 동작구 노량진 소재의 사육신 공원에 다녀와서 포스팅한다.
지난주 수십 년 전에 다녀온 서울 동작구 노량진 소재의 사육신 공원에 다녀와서 포스팅한다. 잘 아시다시피 사육신(死六臣)은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6명의 신하들 학창 시절 누구나 들어본 역사적 사건의 인물들일 것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이방원(태종)에게 붉은 피를 흘린 정몽주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충신의 대명사다.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 임금에게 신임을 받았고 문종 임금에게서 나이 어린 세자(단종)을 잘 도와 달라는 명을 받은 신하들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에게 저항하고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한 충신들이다.
 
충절의 상징인 사육신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생각해본다.
 

● 사육신 공원 개요
 
▶ 서울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8호
▶ 지하철 노량진역(1.9호선),노들역(9호선)에서 약5분 거리
▶ 홍살문, 불이문, 의절사, 신도 비각, 육각비, 묘, 사육신 역사관, 꽃밭 정원, 한강 조망대, 특히 조망대는 매년 10월 초 한강 불꽃 축제를 보기 좋은 장소로 알려짐
▶ 공원 일대는 40,940㎟ 규모에 소나무, 전나무, 버짐 나무, 회화나무 등 33종 15,000주 수목이 있어 데이트 장소로 좋고 노량진 학원가의 학생들 공부방과 지역민들의 운동하는 곳과 쉼터임
▶ 공원에 들렀다가 출출하면 노량진 수산 시장이나 노량진 학원가 길거리 음식 및 맛집 이용함
▶ 사당은 오전 9시부터 18시까지이며 사당 외 지역은 24시간 무료 개방
▶ 매년 10월 9일에 위패를 모시고 추모제향 실시
▶ 700m 거리에 정조 임금이 화성 가던 길에 쉬었던 한강대교 남단 언덕의 용양봉저정을 볼거리로 추천함
 
▼ 사육신 공원 항공사진
 
 

 
사육신 스토리와 묘역과 공원에 대하여 알아보자.
 
▼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은 동지의 밀고로 실패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1445년)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란, 왕(세조)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쓰다 목숨을 잃은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에 추가로 김문기를 모신 곳이 사육신 묘역이다.
 
이들은 단종 3년(1455년)에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분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노리던 중, 1456년 6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과 유응부가 세조 일파를 처단하기로 계획하였으나 사정이 생겨 진행하지 못 했다. 이들의 계획이 좌절되자 거사 동지이며 집현전 출신인 김질(金礩,후에 좌의정, 정창손의 사위)과 정창손이 세조에게 단종복위 계획을 밀고하여 연루자들이 모두 붙잡혔다.
 
▼ 모진 고문과 형벌을 받고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함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세조를 ‘전하’라 하지 않고 ‘나으리’라 불렀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진상을 자백하면 용서한다는 말을 거부하고 형벌을 받았다.
 
성삼문은 수양대군(世祖)에게 무참히 국문을 당하고 능지처사 , 박팽년, 유응부, 이개는 단근질로 죽음을 당하였고, 하위지는 참살 당하였다. 류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고, 김문기(金文起)도 사지를 찢기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본인은 사망하였지만 멸문지화는 피했다. 그래서 김문기는 사육신에 포함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사육신의 가족은 남자는 3대(본인과 형제, 아버지, 자식들)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여자의 경우는 남의 노비로 끌려가는 등 70여명이 모반 혐의로 화를 입었다.
 
▼조선시대 신원 복권과 명에회복
 
사후 228년만에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렬한 의기를 추모하고자 1681년(숙종 7)에 민절서원(愍節書院,사육신 묘역뒤에 주줏돌만 남았다 함)을 세웠고, 1782년(정조 6)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지금까지 남아있다.
 
▼ 해방후 시설 보완
 
1955년에 신도비 맞은편에 육각(六角)의 사육신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는 이들의 충성스럽고 의로운 영혼을 위로하고 그 정신을 널리 현창하고자 3,240평이었던 묘역을 9,370평으로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 사육신묘에 무덤이 7인이 이유
 
현재 이곳에 여섯이 아닌 일곱 분의 묘가 조성되어 있는 경위는 다음과 같다. 세조 2년 단종복위사건 가담자들의 참혹한 죽음 이후, 어느 스님(김시습?)이 성승·박팽년·유응부·성삼문·이개 다섯 분의 시신을 현재의 위치에 모셨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세조 2년 6월 병오년 기록에는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김문기·박팽년을 비롯한 성승·유응부 등의 이름이 보이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에는 성삼문·박팽년·이개·유성원·하위지·유응부를 ‘사육신’이라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성승의 묘를 찾을 수 없어 네 분의 묘만 있었으나, 여전히 사육신묘라 불렸다.
 
1978년 서울특별시가 사육신묘 일대를 성역화하면서 육신에 대한 논란을 조정하였는데, 그 결과로 사육신묘에는 일곱 분의 묘가 모셔지게 되었다.
 
즉 본래 이곳에 있던 박팽년·성삼문·유응부·이개의 묘에, 하위지·유성원·김문기의 가묘(假墓)를 새로이 만든 것이다. 의절사 내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박팽년·유응부·이개·유성원·성삼문·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 서울 지하철 9호선 1번출구
 
▼ 1977년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판정 결의문 (사육신 공원가는 길에 있음)
 
▼ 김문기 사육신 현창 기념비로 결정문 옆에 있음
 
▼ 사육신 공원 담벽과 장식이며 타일 일부가 떨어져 보수 필요하다.
 
 
 
 
 
 
추운 겨울을 지나 피는 매화는 선비 선호 1위( 퇴계이황, 남명조식의 매화이야기는 유명함)
 
▼ 함석헌 글
 
사육신이 죽지 않았던들 우리가 "의(義)"를 알았겠는가?
고난 뒤에는 배울 것이 있다.
 
 
▼ 육교에서 본 사육신 공원 알림판과 담벽
 
▼ 사육신 공원 정문
 
 
▼정문(正門) 오른쪽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터란 표지석에 대하여
 
경종때 연잉군(후에 영조)을 세자로 책봉하다 죽은 4대신(영의정 김창집,좌의정 이이명,우의정 조태,좌의정 이건명)을 기리고자 영조가 즉위하여 희생자 전부를 명예회복시키고 1726년 3월에 노량진에 사충서원을 건립토록 명령을 내리고 종묘를 짓고 남은 재목을 하사하였다. 이 해 8월에 준공되니 원액(院額-서원의 현판)을 친필로 써서 하사하고 4대신을 배향한후 제관을 보내 제를 지내게 하였다.
 
1927년 봄 이곳이 철도용지로 편입되게 되어 서울 용산구 보광동으로 옮겨 지었는데 6.25사변으로 불에 탄후 수복후 피난민의 판자촌이 들어와 도저히 이곳에 복원할수 없어 1968년 하남시 성산곡동 100번지로 옮겨 중건하였다.
 
사충서원의 건물은 이전시 새로 지어서 옛모습은 없으나 그 앞에 있는 묘정비(廟庭碑)는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고 4대신의 영정도 보존되고 있다.
 
☞개인 의견: 이곳 정문은 철도용지로 편입될 위치가 아니고 또한 사육신 묘소뒷편에 민절서원이 있었다고 하므로 현 위치보다 한강철교 입구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 현재 하남시 사충서원
 
묘정비(廟庭碑)
 
▼ 사육신 공원 배치도
 
☞ 안내도에 같이 넣으면 좋은 장소로 육각비, 민절서원 터를 추천함
 
▼ 오르막에 있는 홍살문
 
▼ 설명 안내판
 
▼ 불이문(不二門) :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
 
▼ 1782년에 세운 정조의 신도비(神道碑,죽은 사람의 사적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를 보호하는 비각
 
 
▼ 1782년 세운 육신묘비는 조관빈(趙觀彬, 1691-1757)이 1747년(영조 23)에 작성한 「노량육신묘비명 병서(露梁六臣墓碑銘 幷序)」를 새겼다.
 
☞ 높이 214cm, 너비 79cm, 두께 42cm
 
☞ 글씨는 「근례비(謹禮碑)」 등 당나라 안진경의 글씨체를 집자했고, 비액은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이라는 글자를 전서로 새겼다.
 
☞ 영의정 이휘지(李徽之, 1715-1785)가 지어(識語,본문이나 서문·발문의 처음과 끝)를 썼다. 이휘지는 1747년 이후 사육신에게 내린 은전을 차례로 적고 비석을 세운 전말을 기록하고, 끝에 ‘崇禎三壬寅 月 日立’이라고 일자를 적었다.
 
☞ 조관빈은 「노량육신묘비명 병서」에서 처음으로, 김시습이 육신의 시신을 수습해서 노량진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 정조의 수원화성 능행때 이곳에서 멀지 않은 용양봉저정(한강대교 남단 언덕)에서 쉬면서 이곳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충신들이 내 밑에 많았으면 좋겟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有明朝鮮國六臣墓碑銘 幷序(유명조선국육신묘비명 병서)
 
▼ 1955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지시로 세운 육각 사육신비로 면마다 사육신의 시나 시조를 서예가 김충현썼다.
 
 
▼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때 독야청청(獨也靑靑)하리라.
 
 
▼ 박팽년(朴彭年)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오랴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그칠 줄이 아시랴
 
 
▼ 이개(李塏)
 
방안에 혓는 촛불 놀과 이별하였관대
겉으로 눈물지고 속타는 줄 모르는고
저 촉불 날과 같아서 속 타는 줄 모르도다
 
 
▼ 유응부(兪應孚)
 
將軍持節 鎭伐邊 장군지절 진벌변
沙塞塵晴 士卒眠 사색진청 사졸면
駿馬五千 嘶柳下 준마오천 시유하
豪鷹三百 佐樓前 호응삼백 좌루전
 
역(譯)
장군의 지휘로 변방의 오랑캐를 무찌르고
세상이 조용하니 병졸들도 잠이 들었네
준마 오천필이 버들 아래서 울고
사냥매 삼백은 루 앞에 앉아 있네
 
 
▼ 하위지(河緯地)
 
남아득실고유금 男兒得失古猶今
두상분명백일임 頭上分明白日臨
지증사의응유의 持贈蓑衣鷹有意
강호연우호상심 江湖烟雨好相尋
 
역(譯)
사나이의 득실을 고금이 다룰게 없고
머리위엔 분명이 해가 비치고 있는데
도롱이를 보내준 뜻 어찌 몰겠는가
강호에 묻혀 조용히 살라는 그 참뜻을
 
 
▼ 류성원(柳誠源)
 
白山拱海 摩天嶺 백산공해 마천령
黑水橫坤 豆滿江 흑수횡곤 두만강
此地李侯 飛騎處 차지이후 비기처
剩看胡盧 自來降 잉간호로 자래강
 
역(譯)
바다를 끌어들인 마천령 산맥에
땅을 가로지른 두만강 물줄기어라
이곳에서 이후는 힘찬 말 달려 놓고
오랑케 항복 받던 그 모습 눈에 선하네
 
 
▼ 7인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祀)는 정면 5칸 측면4칸 팔작지붕 건물. 그 앞 양쪽에는 느티나무가 보이고 잔디밭에는 감이 열렸다. 선비의 상징인 매화나무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7인의 위패와 향로
 
 
 
 
▼ 의절사에서 묘역으로 나가는 문 지붕 기와에 푸른 이끼와 쌓인 나뭇잎은 세월을 말해준다.
 
 
사육신들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뒤편으로 사육신묘가 자리하고 있다. 묘지에 이르는 나지막한 언덕엔 <아차고개>라는 흥미로운 이름의 전설도 있다. 영등포에 살던 선비가 사육신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를 막기 위해 길을 나섰는데, 아차고개에 이르렀을 때 사육신이 죽음을 맞았다. 한 발 늦었구나 하는 '아차'하는 탄성이 그 고개의 이름이 됐다. 아마 오랜 세월 지나며 하나로 이어진 애도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 이름 모를 비석(아차고개)
 
▼ 묘역은 2구역으로 나눠져 있고 나중에 만든 비석은 새 것(가묘)으로 표시가 난다.
 
 
☞ 묘역입구에 전체 배치도가 있으면 이해하는데 편리할 듯하다. 한글 세대이므로..
 
▼ 하위지, 성삼문, 류성원 (좌측부터)
 
▼ 이개, 유응부, 박팽년, 김문기 (좌측부터)
 
▼ 하씨지묘(河위지)
 
▼ 성씨지묘(成삼문)
 
▼ 류씨지묘(柳성원)
 
▼ 이씨지묘(李개)
 
▼ 유씨지묘(兪응부)
 
▼ 박씨지묘(朴팽년)
 
▼ 김씨지묘(金문기)
 
 
후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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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화대백과. 구글, 네이버지식백과,네이버지도,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오마이 뉴스,고려대학 해외한국학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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