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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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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 쇠둘레 길. 그리고 한반도 중심 철원 (201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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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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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석정(孤石亭) 철원군(鐵原郡) # 철의 삼각지
【여행】
(2017.11.22. 13:50) 
◈ 고석정. 쇠둘레 길. 그리고 한반도 중심 철원 (2015.5.22)
철원 여정의 마지막으로 도피안사, 월정리역과 두루미관 및 노동당사,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에 이어 오늘은 고석정(孤石亭)과 임꺽정, 쇠둘레 길, 한탄강 레프팅, 번지점프 그리고 철원의 근대 문화재를 소개합니다.
철원 여정의 마지막으로 도피안사, 월정리역과 두루미관 및 노동당사,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에 이어 오늘은 고석정(孤石亭)과 임꺽정, 쇠둘레 길, 한탄강 레프팅, 번지점프 그리고 철원의 근대 문화재를 소개합니다. 아시다시피 철원은 넓은 평야와 용암지대인 한탄강, 그리고 금강산 가던 철길 등 볼거리도 많지만 국토 분단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서 남북 통일이 되어 옛날 철원의 부와 영광을 되찾는 그 날이 오길 손꼽아 봅니다.
 

 
● 고석정(孤石亭)
 
한탄강(漢灘江) 중류 강변에 위치한 고석정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입니다. 한탄강 한폭판에 치솟은 10여m 높이의 거대한 기암(고석)이 우뚝 솟아 있고, 허벅지쯤으론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릅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 처음 10평 정도 규모의 2층 누각을 지었다고 하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眞平王)과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하고 이 외에도 고려 승려 무외(無畏)의 글과 김양경(金良鏡)의 시 등이 전합니다.
 
그리고 조선 명종 때에는 의적당(義賊黨)의 두목 임꺽정(林巨正)이 관군에 쫓기던 끝에 고석정 아래서 꺽지로 변했다는 전설이 유명할 뿐 아니라 고석정 건너편 산 정상에 길이 868m의 석성을 쌓고 칩거하면서 조공물(朝貢物)을 탈취하여 빈민을 구제했다고도 합니다.
 
현재의 정자는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던 것을 1971년 재건한 것으로 규모와 형태는 전과 비슷하나 콘크리트로 만들었습니다.
 
 
고석과 한탄강
 
 
고석
 
 
 
 
 
 
고석정 복원기
 
 
유람선
 
 
 
● 철원 안보관광 안내소와 철의 삼각지 전적관
 
민통선 안보관광하려면 꼭 거쳐야 하는 철원관광안내소로 매주 화요일 휴무합니다.
 
 
철의 삼각전적관
 
 
 
 
▷잠깐 철원군의 명칭은?
 
☞ 철원군은 고구려시대에 철원 또는 모을동비라 하였고 신라의 경덕왕시 철성이라 고쳤습니다. 그 후 궁예가 901년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풍천원(현 철원군 북면 홍원리)에 정하고 국호를 마진이라 하였으며, 년호를 무태, 성책이라 하고 919년(고려 태조) 철원으로 개칭한 후 동주로 개명하였고 1310년에 다시 철원부로 하였습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과 동시에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철원군 전역이 공산치하에 들어 갔다가 6.25동란이후 국군의 북진에 따라 일부 지역이 수복되었습니다.
 
 
 
등나무 꽃
 
 
 
★ 임꺽정 동상 : ? ∼1562(명종 17). 조선 중기의 의적(義賊).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居叱正)이라고도 하며 양주의 백정 출신입니다.
 
여러 해 연이어 흉년이 계속된 데다가 당시 척족 윤원형(尹元衡)·이량(李樑) 등이 발호하고, 관리들의 수탈이 횡행하는 틈을 타 도둑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날쌔고 용맹스러웠으며 자기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어지러운 사회를 틈타 처음에는 도당 몇 명을 모아 민가를 횡행하며 도둑질을 일삼았으나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해 구월산 등지를 소굴로 삼아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였습니다.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등 의적의 행각을 벌이자, 이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결탁해 내통하여 관에서 잡으려 하면 미리 정보를 알고 달아났다 합니다.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 정탐시키자 그들 무리는 미투리(신발)를 눈 위에 거꾸로 신고 다니면서 행방을 감추었고 선전관이 구월산에 들어가 그들의 행방을 찾다가 돌아올 적에 도둑들은 선전관을 잡아 죽였습니다.
 
1559년(명종 14) 집을 개성에 두고 개성 근방에서 출몰하자 개성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인 20여 명을 데리고 그들의 소굴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한 명을 내렸지만 한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도둑잡기를 게을리하는 수령에게는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는 조처를 취하였으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습니다.
 
1560년 8월에는 서울에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여 장통방(長通坊 : 종로구 종로2가 부근)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는데 이 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을 잡았고 임꺽정의 아내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 해 10월에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였지만 이들은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부렸습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겁탈을 일삼아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혔습니다. 이들은 이 때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 정보를 알아내기도 했는데 이 해 12월에 엄가이(嚴加伊)라는 도둑 두목이 숭례문 밖에서 잡혔는데, 바로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徐林)이었습니다.
 
서림의 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감옥)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났으며 또, 이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차례 잡은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李欽禮)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여 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하였는데 그 때 도둑무리는 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관군을 무찔러 부장 연천령(延千齡)을 죽이고 많은 말까지 빼앗아 달아났습니다.
 
이에 임금은 황해도·평안도·함경도·강원도·경기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게 하였으며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辛商輔)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자, 백주에 도둑 무리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처자들을 구출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해 12월에 황해도에 순경사로 파견된 이사증(李思曾)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의금부에서 추고(推考 : 죄가 있는 관원을 신문해 그 죄를 살펴 봄) 해보니 임꺽정의 형인 가도치(加都致)였기에 그 책임을 물어 순경사 이사증은 파직, 추관(推官) 강려(姜侶)를 하옥하게 하는 조처를 내렸습니다.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해졌고, 관군의 물자마저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1561년 9월에 평안도관찰사 이량은 의주목사 이수철(李壽鐵)이 임꺽정과 한온(韓溫)을 잡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여 이들을 의금부에 데려와 조사를 하니 해주 출신의 군사인 윤희정과 윤세공이었습니다.
 
이들은 의주목사의 꾐에 빠져 거짓 자복했는데 서림이 이들을 보고 가짜라고 지적하여 이수철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고 이 해 10월 임꺽정 일당이 해주에서 평산으로 들어와 대낮에 민가 30여 호를 불태우고 많은 사람을 죽인 사건이 일어나니 이에 조정에서는 서림을 통해 임꺽정을 꾀어낸다는 방침을 바꾸고 새로운 조처를 모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황해도 토포사(討捕使)로 남치근(南致勤), 강원도 토포사로 김세한(金世澣)을 임명해 정병을 딸려 보냈고 이어 개성과 평양의 성내를 샅샅이 뒤졌으며 서울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등에 수문장의 수를 늘리고 날짜를 정해 새벽부터 일시에 수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 중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는 자는 달아났으며 이에 포졸들은 달아나는 자들을 잡아들였고 조금이라도 수상쩍으면 감옥에 넣어 온종일 서울은 호곡소리로 들끓었다 합니다.
 
한편, 정시(停市 : 시장을 일시동안 정지시킴) 및 모든 관청일을 중단시켰는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도둑으로 끼어 드는 일을 막기 위해 수색을 금했고, 황해도에는 세금 전부를, 평안도에는 세금 절반을 탕감하였습니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의정부에서는 “토포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래 유둔하고 있어서 군민(軍民)이 곤궁, 피로하고 일도가 탕연해 원망의 소리를 귀로 차마 들을 수가 없다.” 하고 일단 많은 도둑의 졸개가 잡혔으니 임꺽정을 잡는 일은 평안도·황해도의 감사·병사에게 맡기고 토포사를 올라오게 하였습니다.
 
1562년 정월, 남치근은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郭舜壽)와 홍언성(洪彦誠)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올렸는데 ≪기재잡기 寄齋雜記≫에는 임꺽정이 잡힐 적의 정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남치근이 재령땅에서 진을 설치하니 임꺽정은 날쌔고 건장한 자만을 데리고 구월산에 들어갔고 나머지 무리에게는 요소요소를 지키면서 산을 올라가며 계속 수색하며 남은 무리를 죽이자 임꺽정은 골짜기를 넘어 도망했는데, 계속 민가를 수색하자 임꺽정이 민가에 뛰어 들어왔습니다.
 
임꺽정이 주인 노파를 위협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며 나가게 하였다.
 
이에 임꺽정이 칼을 빼고 뛰어나오며 도둑놈은 달아났다고 소리쳐서 군졸들이 혼란한 틈을 타 술렁거리자, 군졸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다가 서림이 “저 놈이 임꺽정이다.”라고 소리쳐 끝내 상한 몸으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그의 이름을 알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인 지 약 3년 만에 잡혔고, 잡힌 지 약 15일 만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려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임꺽정은 이러한 정상을 이용해 자기의 신분 차별에 대한 한을 풀어보려고 했고, 그러한 처지에 놓인 두령을 끌어 모았으며 그리고 5도를 횡행하며 관군을 괴롭혔고 온 나라를 소란에 빠뜨렸습니다.
 
그가 죽고난 뒤 명화적(明火賊)은 그를 의적으로 떠받들었으며, 무수한 설화를 낳았고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홍길동(洪吉童), 장길산(張吉山)과 함께 조선의 3대 도둑으로 꼽았습니다.
 
 
● 철원 쇠 둘레길
 
 
▶ 한여울길과 한탄강 생태 순환 탐방로
 
 
​>>>- ▶ 철원팔경의 하나인 순담은 고석정에서 한탄강 하류 쪽으로 2㎞ 떨어진 군탄리에 위치하며 이곳은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兪拓基)가 요양하던 곳이며,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金觀柱)가 요양할 곳을 찾다가, 아담한 산들이 거문고 형상을 이루고 맑은 물이 굽이치는 이곳에 와서 20평 정도 넓이의 연못을 판 뒤 제천에 있는 의림지(義林池)에서 순채(蓴菜)를 옮겨다 심고 순담(蓴潭)이라 부른 데서 그 이름이 연유합니다.
 
▶상류 2 km 지점에 폭 80m, 높이3m의 속칭 "한국의 나이아가라"라는 직탕폭포(철원 팔경)가 있습니다.
 
 
▶ 체험거리로 태봉대교의 번지점프와 한탄강 레프팅이 유명합니다.
 
 
 
▶ 6.25전쟁 후 철원평야를 잃어버린 김일성이 몇일간 울었다고 하는 이곳 청정지역에서 나오는 철원쌀(오대미)은 밥맛이 좋으며, 현무암 석재로 만든 맷돌이 유명하고, 음식으론 한탄강 민물 매운탕을 많은 분들이 찾고 있습니다.
 

 
● 철원의 근대 문화재
 
① 월정리역
 
② 금강산 철길​
 
③ 노동당사
 
④ 농산물 검사소 ; 1936년에 농산물검사소로 지상2층, 연면적 135㎡ (40.9평) 규모의 시멘트벽돌 조적조 건축물로 신축되었으며, 벽체는 두꺼우며, 외부창은 상하가 긴 형태며 지붕은 목조틀로 형태는 팔작지붕에 시멘트기와를 올린형태로 경사도는 낮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재 구 철원 시가지 유적 중에서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건물입니다.
 
⑤​ 암정교 ; 1930년경 건립된 120m의 멋진다리로 일부가 부서진 형태로 민통선 안에 있습니다.
 
⑥ 얼음창고 : 1946년에 건립한 일본인 식당의 얼음보관창고이며 지상1층 박스형태의 철근콘크리트조 건축물로 한국전쟁으로 거의 파괴되어 현재는 건물벽의 잔해만 남아있습니다.
 
⑦ 제2 금융조합​ : 1936년 이전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금융(은행) 건물로서 1936년 당시 구 철원 시가에는 석산은행 철원지점을 비롯하여 동주금융조합, 철원금융조합, 철원제2금융조합등 4개의 금융기관이 있었는데 본 조합은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현재는 철근콘크리트로 건축된 금고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⑧ 제일감리교회 : 붉은벽돌의 조적조 양식 건물을 완공 후 1936년에 지하1층 지상3층 규모의 화산석과 화강석을 쌓아만든 석축건물로 재건축했습니다. 그 당시 신도수가 500여명에 달했으며 1919년 3.1운동당시, 강원도에서 제일먼저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⑨ 철원역​ : 철원역은 경원선의 중심역이며 금강산전철의 시발역으로 철원역에서 서울(용산)까지 97.3km(2시간), 원산까지는 124.1km(3시간)였으며, 철원역에서 내금강까지 운행된 금강산 전철은 116.6km로 4시간 반이 소요되었습니다.
 
⑩ 철원 수도국지내 급수탑 : ​강원도내 최초의 상수도 시설로 첨전지, 레벨에 따른 급수시설 4기가 건립당시 위치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⑫​ 승일교 ;
소련식유럽공법의 철근콘크리트라멘조 아치교로서 교량의 조형미 가 돋보이는 교량높이 35m, 길이120m, 폭 8m 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입니다. 현재 새로 놓여진 철교로 인해 더 이상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른 볼거리
 
①비둘기 낭
 
2012년 9월 25일 천연기념물 제537호로 지정되었고 폭포 뒤의 동굴에서 백비둘기들이 집을 짓고 살았는데, 비둘기 둥지와 같이 움푹 파인 낭떠러지라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비둘기낭 폭포는 포천 한탄강 주상 절리 협곡과 동일하게 한탄강 용암 대지가 불무산에서 발원한 불무천에 의해 개석되면서 형성된 폭포입니다.
 
 
②삼부연폭포
 
삼부연 폭포는 철원군청에서 동쪽으로 약 2.5km 떨어진 명성산 중턱의 조용한 계곡에 있는 높이 20m에 3층으로 된 폭포로 사계절 마르지 않는 물과 기이한 바위가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루어 신비로움을 불어 일으키며 폭포의 물 떨어지는 곳이 세군데 있는데 그 모양이 가마솥 같다하여 삼부연이라고 부릅니다
 
 
③승일교
 
​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로 불리며 철원군 지역 주민들 사이에
 
① 김일성이 시작하여 이승만이 끝냈다고 하여 이승만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한자씩 따서 승일교(承日橋)라 했다는 설
 
② '김일성을 이기자'고 해서 승일교(勝日橋)라고 했다는 설이 전해지나
 
③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한국 전쟁 중 큰 공을 세우고 조선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박승일(朴昇日, 1920년~ ? ) 연대장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昇日橋)라고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④ 백마고지
 
​철원군 북방에 있는 이 백마고지는 6.25동란 당시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로 1952년 10월 6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10일 동안에 걸쳐 대 혈전이 계속되었던 백마고지 전투는 피아의 포탄낙하가 30만발이 작렬했고 고지의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습니다. 흙먼지와 시체가 뒤엉켜 악취가 코를 찔렀으며 피아 간의 포격으로 산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형상과 같다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만 4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어 2개 사단이 완전 와해되고 말았으며 국군 제9사단은 백마고지의 대승을 계기로 백마사단이라 명명되었습니다.
 
 

 
※ 철원 안보관광 안내
 
철원은 북한과 접경지역으로 안보견학을 신청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도피안사, 노동당사 ,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3곳이며 그 외는 관광안내소에 반드시 신청하여 안내공무원 인솔하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문의처 ① 철의삼각전적관 매표소 ☎ 033-450-5558 ② 승리전망대 매표소 ☎ 033-450-5900 ③ 백마고지 매표소 ☎ 033-450-5683이며 매주 화요일은 휴무)
 
 
 
출처: 철원군청, 민족문화대백과사전,네이버,구글
고석정(孤石亭) 철원군(鐵原郡) # 철의 삼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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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