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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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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에서 무엇을 배울까? 창의문~ 돈의문 터 (201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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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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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京橋莊) 돈의문(敦義門) 종로구(鍾路區) 창의문(彰義門) 한양도성(漢陽都城)
【여행】
(2017.11.23. 10:29) 
◈ 한양도성에서 무엇을 배울까? 창의문~ 돈의문 터 (2015.5.26)
한양도성 탐방기중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는 이미 포스팅했고, 오늘은 창의문에서 돈의문(서대문)터 까지 포스팅합니다.
한양도성 탐방기중 말바위에서 창의문까지는 이미 포스팅했고, 오늘은 창의문에서 돈의문(서대문)터 까지 포스팅합니다. 옛말에 "아는 만큼 보이고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생각나는 구간입니다. 한양도성의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은 일제가 도로를 만들면서 없어졌고 또한 일부 성곽은 가옥의 축대로 사용중인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며 문화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의 결과로 봅니다.
 
1919년 3.1운동을 해외에 알렸던 앨버트 테일러부부가 살던 "딜쿠샤"하우스는 제대로 알지도, 관리하지도 못했었고 <봉선화>의 작곡가 홍난파 가옥과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이셨던 백범 김구가 살던 경교장은 개방하고 있습니다. 오직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불철주야 헌신하신 김구선생님을 존경합니다. 백범 살해범 안두희는 그 당시 사형을 면했지만 역사의 준엄한 심판은 용서치 않습니다. 이처럼 역사 앞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행동하시는 분은 지금 대한민국을 떠나시면 참 좋은데......
 
● 탐방 개요
 
▶일시 : 2015. 5.16(토)
▶내용 : 정독도서관 서울 성곽 순성 강의 및 현장 답사와 해설 들으며 걷고 배우기
▶누구와 : 권기봉 작가와 참가자 및 도서관 관계자
▶걸은 구간 : 정독도서관 →총리공관앞→ 칠보사 앞→ 삼청공원→ 말바위→ 도성안내소→ 숙정문 → 청운대→ 총알맞은 소나무(1.21사태)→ 백악산 → 창의문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시" → 인왕산 정상대신 차도로 이동 → 호랑이 동상 → 행주대첩의 권율 도원수 집터 → 딜쿠샤하우스 → 성곽 훼손 현장 (가옥 축대) → 홍난파가옥 → 경교장 → 돈의문 터 → 정동 이화백주년 기념관 → 중명전 → 정동교회 → 배재학당 사잇길 → 중앙일보사옥 옆길 → 대한상공회의소 옆 → 숭례문
▶소요시간 : 강의 90분, 현장 답사 5시간
 
 
● 힌양 도성 개요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힌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1396년(태조5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일. 8월26일부터 9월24일까지 총 98일 동안 전국에서 약 20만명을 동원해 백악, 낙산, 목멱산 (남산), 인왕산 능선을 따라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석성으로 축성하였습니다.
 
전체구간을 97구간(600척씩)으로 나누고 각구간을 천자문(하늘 천,따지)순서에 따라 이름 붙인 뒤 군현별로 할당하였고 성을 쌓을 때 일부 성곽돌에 공사에 관한 기록을 남겼는데, 태조와 세종때는 구간명, 담당 군현명을 새겼고 숙종이후는 감독관, 책임 기술자, 날짜 등을 명기하여 책임소재를 밝혔습니다.
 
성곽에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는데 4대문은 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남쪽 숭례문, 북쪽 숙정문이고 4소문은 4대문 사이에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으로 성안과 밖을 연결했습니다.
 
1422년(세종4) 도성 수축 공사때 흙으로 쌓은 구간도 석성으로 고쳐 쌓았고 임진왜란때 일부가 부서졌으며 1616년(광해군 8)에 개수하였으나 병자호란때 다시 부서졌습니다.병자호란때 청나라와 맺은 조약에 성벽을 쌓지 않고 보수도 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 부서진 채로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30)에 오군문(五軍門) 장병들을 동원해 성곽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습니다. 영조와 순조때도 부분 보수를 했지만 현재의 한양성곽은 대체로 태조, 세종, 숙종시대의 것입니다.
 

 
▼ 한양도성 구간별 내용
 
▼ 한국인이 좋아하는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에 윤동주 문학관이 있으며 무료 관람입니다.
 
 
▼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있는 서시(1941년 11월 20일 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 윤동주 시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 고향집에 조선족으로 표시. 연세대 학적부의 본적(本籍)은 함경도로 적혀있습니다.
 
▼ 북한산 방향의 성곽과 풍광
 
 
▼ 인왕산(仁王山)
 
인왕산의 높이는 338m.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암반이 노출된 것이 특징이며 서울의 성곽은 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며 동쪽 산허리에 북악산길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납니다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는데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습니다.
 
 
▼ 진경 산수화가인 겸재 정선이 안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齊色圖)
 
▼ 시간상 인왕산(仁王山) 등산로로 가지않고 사직공원 방향으로 갑니다.
 
▼ 참가하신 분들 수고하셨습니다.
 
 
▼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한양도성 탐방로와 만났습니다.
 
▼ 새로 축성한 성곽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 선바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형상이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 같아서 ‘禪(선)’자를 따서 선바위[禪巖]라 합니다.(겨울 사진)
 
 
▼ 성곽아래 활짝핀 꽃
 
 
▼ 높이 24미터. 둘레 6.8미터의 420년된 은행나무 보호수
 
▼ 은행나무 옆의 권율 도원수 집터 표지석
 
★ 행주산성에 대하여 알고 싶으시면 여기를 누르세요.
 
 
▼ 딜쿠샤 (DILKUSHA, 딜쿠샤란 희망의 궁전, 이상향의 뜻을 가진 힌두어)
 
건축주 앨버트 테일러(1875~1948)는 미국 출신의 광산업 및 무역업자로, UPI 통신사는 1919년 광무제(고종)의 승하 당시 이를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서 사업을 하던 그를 특파원으로 임명하였으며,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뉴스로 타전하며 세계에 우리의 독립 의지를 알렸던 테일러는 기업인인 동시에 통신사 특파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앨버트 테일러 부부는 1923년 독립문 인근의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이곳에 붉은 벽돌로 2층 양옥을 지어 집의 별칭인 딜쿠샤(힌디어: दिलकुशा)는 테일러의 아내 메리 린리 테일러의 뜻에 따라 붙인 것으로, 힌디어로 '기쁨, 이상향'을 뜻하며, 인도 북부 러크나우 지역 곰티 강 인근에 자리잡은 딜쿠샤 궁전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이 집은 1926년 7월 26일 낙뢰 화재로 손상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 복구되었으며,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어 1942년 일본 제국의 자국령 내 미국인 추방 조치에 의해 조선에서 추방될 때까지 앨버트 테일러는 이 곳에서 거주하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1948년 사망했지만 유언에 따라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묻혀 있습니다.
 
 
현재
 
1920년대
 
▼ 현재 소유주 한국자산공사의 안내문
 
이라는 집의 이름과 건축연도가 보이고 그 밑에 성경 구절 (시편 127장 1절 :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은 가려 글씨일부만 보입니다.
 
▼ 1920년대 사진
 
 
▼ 한양도성을 가옥의 축대로 사용중인 훼손 현장
 
 
 
▼ 홍난파 가옥
 
▼ 홍난파(1897∼1941.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지휘자)
본명은 영후(永厚).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지금의 화성시 활초동)에서 출생하였고 일제강점기에 널리 애창되었던 가곡 <봉선화>의 작곡자이며 조선정악전습소 교사, 경성방송 현악단 지휘자,빅터레코드 양악부장을 역임했습니다.
 
 
 
 
다시 성곽길
 
 
▼ 경교장(京橋莊)
 
사적 제465호. 경교장은 최창학(崔昌學) 소유의 별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金九)가 1945년 11월 중국에서 귀국한 이후부터 1949년 6월 생애를 마칠 때까지 생활하던 사저 겸 집무실이었습니다. 당시 그 일대의 명칭이 다케조에마치[죽첨정(竹添町)]여서 건물 이름을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명하였으며, 정치 활동이 본격화되자 ‘서대문 경교장’이라 했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 지금의 종로구 새문안로에 있는 강북삼성병원 자리에 연면적 945.45㎡의 지상 2층, 지하 1층의 단아한 양관으로,근대 건축가인 김세연(金世演)이 설계하여 1938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전면 분할의 비례가 아름답고 1층의 출창(出窓)과 2층의 들임 아치창을 이용한 외관이 특징입니다.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김구가 주도하는 반탁·건국·통일운동의 민주적 총본산격이어서, 이승만(李承晩)의 돈암장 혹은 이화장, 김규식(金奎植)의 삼청장(三淸莊)과 함께 정부수립 이전 건국활동의 3대 장소였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공관으로 상당기간 활동본부 구실을 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내세운 민족주의 추구의 우국 정객들이 모여든 경교장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활동이나 건국실천원 양성에 주안점을 둔 보루로서 이곳 경교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김구 휘하의 엄항섭(嚴恒燮)·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 등이 정사를 주재하여 자주적 통일운동이 본격화되기까지 광복 후 이곳에 많은 인사들이 집결하였습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집무실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시해된 뒤 국민장을 거행할 때, 당시 거족적인 애도 인파가 몰린 명소였으나 완전독립과 통일지향의 역사적인 영광과 시련이 교차된 경교장은 주인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1968년 삼성재단이 매입하여 고려병원(1995년 강북삼성병원으로 개칭)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가 현재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습니다.
 
 
현재 경교장
 
▼ 1949.1월 경교장의 김구 가족 사진
 
※ 백범 김구
 
① 1876(고종 13)~1949.
-②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③ 본관은 안동(安東)
④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개명하여 구(龜, 九)
⑤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두래(斗來)
⑥ 자는 연상(蓮上), 초호(初號)는 연하(蓮下)
⑦ 호는 백범(白凡)
⑧ 독립운동가, 정치가.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했고 광복 후에는 나라의 완전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다가 암살당했습니다.
 
 
▼ 매주 화요일 휴관, 09시~18시, 무료 관람
 
 
▼ 경교장 팜플릿
 
 
 
 
 
 
 
 
 
 
 
▼ 돈의문
 
돈의문은 서울 성곽의 4대문(四大門) 가운데 서쪽 큰 문으로 일명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하며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일제의 도시 계획에 따른 도로 확장을 핑계로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습니다.
 
1890년대 말쯤에 찍은 사진을 통해 대략적인 모습은 견고하게 쌓은 돌축대 한 가운데에 위쪽을 반원형으로 두른 홍예문(虹霓門)을 큼지막하게 내어 도성의 출입을 가능하게 하였고 축대 위에는 단층 우진각지붕의 초루(譙樓)를 세우고 둘레에 낮은 담을 설치하였습니다.
 
건물의 평면 규모나 구조상의 특징은 알 수 없지만 지붕 위에 마루를 양성하고 취두(鷲頭 : 망새)·용두(龍頭)·잡상(雜像)·선인 등을 배열했으며 처음 세워진 것은 1396년(태조 5)으로 도성(都城)의 제2차 공사가 끝나고 8문(門)이 완성되었던 때입니다.
 
태조 때인 1413년에 폐쇄되어 사용되지 않고 서전문(西箭門)을 새로 지어 도성의 출입문으로 사용하였다가 세종 때 다시 서전문을 헐고 그 남쪽 마루에 새 성문을 쌓고 돈의문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으나, 1711년(숙종 37) 9월에 고쳐 지으라는 왕명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숙종 때 고쳐 지어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서울 서북쪽의 관문(關門)으로 사용된 중요한 사적인데, 일본인들에 의해 함부로 철거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로 2022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랍니다.
 
 
▼ 돈의문 터라고 유리판에 부착
경교장(京橋莊) 돈의문(敦義門) 종로구(鍾路區) 창의문(彰義門) 한양도성(漢陽都城)
【여행】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 정동야행(貞洞夜行) 축제 (2015.5.27)
• 한양도성에서 무엇을 배울까? 창의문~ 돈의문 터 (2015.5.26)
• 고석정. 쇠둘레 길. 그리고 한반도 중심 철원 (201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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