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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부여군(扶餘郡)
【여행】
(2017.11.30. 13:28) 
◈ 부여 부소산성 탐방기 (2015. 10. 15)
부여 탐방기의 마지막으로 부여 궁남지, 정림사지 5층석탑,국립 부여박물관, 고란사를 거쳐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사비성(泗沘城)으로 불렸던 부소산성(扶蘇山城)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부여 탐방기의 마지막으로 부여 궁남지, 정림사지 5층석탑,국립 부여박물관, 고란사를 거쳐 백제의 마지막 왕성으로 사비성(泗沘城)으로 불렸던 부소산성(扶蘇山城)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구드래 돌쌈밥으로 점심을 먹고 부소산성 가는 길은 초록색 잔디위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 구름이 깔려있어 참 멋있는 풍광이었다.
 
▼ 제61회 백제 문화제 축제 기념으로 날리고 있는 연
 
 
 
 

 
▼ 부여 역사
 
전쟁에 지면 이긴 자의 기록이 역사가 된다. 그렇다고 진실이 묻히는 것만은 아니다.
 
백제시대 : 538년(성왕 16)~ 660년(의자왕 20) 123년간 백제 왕도
통일신라 : 도독부 설치(2군 2현)
고려시대 : 감무설치(4현 : 부여, 가림, 석성, 홍산)
조선시대 : 1군 3현(임천군, 부여, 홍산, 석성현)
일제강점기 : 1914.3.1 부여군으로 통합(16면)
대한민국 : 1960.1.1 부여읍 승격(1읍 15면)
 
▼ 관아 건물인 부여읍 관북리의 부여동헌(충남 유형문화재 제96호)
 
▼ 객사 : 관청의 손님. 사신이 유숙하는 곳
 
▼ 도강영당(道江影堂, 충남 문화재자료 제116호)은 허목(許穆)·홍가신(洪可臣)·채제공(蔡濟恭)의 위패를 모신 곳
 
☞ 홍가신(洪可臣, 1541-1615)
1567년(명종22) 문과에 급제하여 강화부사. 형조참판.강화도 관찰사를 지냈다.
1604년(선조37)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여 청안공신1등에 책록되어 이듬에 영원군에 봉해졌다.
 
☞ 허목(許穆, 1595-1682)
이조판서.영의정을 지냈고 그림.글씨.문장에 능하였다.
 
☞ 체제공(蔡濟恭, 1720-1799)
1735년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예조.호조판서.영의정.좌의정을 지냈다.
 
 
 
▼ 부여 동헌, 부여 객사, 도경영당 배치도
 

 
● 扶餘 扶蘇山城
 
① 부소산성은 2015년 세계 유산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1곳이며 사적 제5호이다.
 
② 산성 둘레는 2.2km. 높이는 106m이고, 부여읍의 북쪽에 위치하여 반월루(半月樓)에서는 시내가 잘 보이며, 금강에 연하여 있다.
 
③ 백제 성왕때 도읍을 웅진(熊津,지금 공주)에서 이곳 사비(泗沘,부여)로 천도하였다.
 
④ 부소산성은 부소산 정상에 테뫼식 산성(산봉우리를 둘러싸서 성벽을 구축한 것)을 쌓은 후, 주변을 포곡식(성 내에 1개 혹은 그 이상의 계곡을 포용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의 능선을 따라 성벽을 만드는 것)으로 쌓은 복합 산성이다.
 
⑤ 부소산의 남쪽에 있는 삼충사는 성충(成忠)·흥수(興首)·계백(階伯) 등 백제의 세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⑥ 부소산 동쪽에는 영월대(迎月臺)가, 서쪽에는 송월대(送月臺)가 있었다.
 
백제 왕들은 영월대에서 떠오르는 달을 맞으면서 연악(宴樂)하였고, 송월대에서 지는 달을 보며 즐겼다고 한다. 영월대는 영일대라고도 하였는데, 1964년 부여군 흥산에 남아 있던 조선 시대의 관아문루(官衙門樓)를 이곳에 옮겨 <영일루(迎日樓)>라 하였다.
 
⑦ 영월대지 부근에는 백제 시대에 군량을 비축하였던 군창지(軍倉址)가 있어서 지금도 1,300여 년 전의 탄화된 곡식의 알갱이가 나온다.
 
⑧ 부소산의 정상인 서쪽 봉우리에는 1919년 임천현의 아문(衙門)인 배산루(背山樓)를 이전한 누각식 건물인 사자루(泗泚樓)가 있어서, 이곳에서 낙화암·백마강·고란사(皐蘭寺)·수북정 등을 두루 관망할 수 있다.
 
⑨ 낙화암의 위쪽에는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가 백제의 여인들을 추모하여 지은 백화정이 있다.
 
 
▼ 부소산성으로 가는 부소산문 -개인 입장료 2,000원-
 
▼ 부소산문 현판은 무림 김영기 글씨
 
▼삼충사(三忠祠)는 세분의 충신 성충, 흥수,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과거의 삼충제
 
 
 
 
 
▼삼충사 중건 사적비
 
 
▼사당
 
☞ 성충
일명 ‘정충(淨忠)’이라고도 한다. 656년 좌평(佐平)으로 있을 때 의자왕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승하여 자만과 주색에 빠지자 국운이 위태로워짐을 극간하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단식을 하다가 죽음에 임박하여 왕에게 글을 올리기를 “충신은 죽더라도 임금을 잊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신이 항상 시세의 흐름을 볼 적에 멀지않아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때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는 그 지리적 조건을 잘 이용하여야 하는데, 강 상류에서 적병을 맞이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군이 쳐들어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에 못 들어오게 한 뒤,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싸우면 틀림없이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결국 660년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수도 사비(泗沘)로 쳐들어오고, 당나라 군대도 기벌포를 지나 사비성으로 쳐들어와 백제는 멸망하였다. 의자왕은 그때서야 성충의 충언을 따르지 아니한 것을 후회하였다
 
☞ 흥수
​660년(의자왕 20)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치려 하므로, 왕이 좌평의직(義直), 달솔(達率)상영(常永) 등의 신하를 모아 전쟁에 대비하려고 회의를 열었으나 의논이 구구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왕은 사람을 보내 흥수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당병은 수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더구나 신라와 공모하여 앞뒤로 서로 호응하는 세를 이루고 있으니, 만일 넓은 들판에 진을 치고 싸우면 승패를 알 수가 없다. 백강(白江 또는 伎伐浦)과 탄현(炭峴 또는 沈峴)은 우리 나라의 요새지이므로 마땅히 용사를 가려 보내 지키게 하여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대왕께서는 굳게 성문을 닫아 지키고 있다가 적군의 양식이 떨어지고 사졸(士卒)들이 피로해질 때를 기다려 이를 치게 한다면, 반드시 적병을 깨뜨릴 것이다.” 고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흥수는 오랫동안 귀양가 있어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들어줄 수 없다. 당병은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이 때에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새장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 고 하니, 왕이 그럴싸하게 여겼다. 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 계백
​관등은 달솔(達率)이다. 660년 김유신(金庾信)과 소정방(蘇定方)의 5만여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요충지인 탄현(炭峴 : 지금의 大田 동쪽 馬道嶺)과 백강(白江)으로 진격해 오자, 결사대 5,000명을 뽑아 황산(黃山 : 지금의 충청남도 連山)벌에 나가 맞이하였다.
 
그는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한 나라의 힘으로 나·당의 큰 군대를 당하니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욕보는 것이 흔쾌히 죽어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고는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각오하였다.
 
또한, 병사들에게도 “옛날 월왕 구천(越王句踐)은 5,000명으로 오왕 부차(吳王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마땅히 각자 분전해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결사대는 험한 곳을 먼저 차지해 세 진영으로 나뉘어 연합군에 대항하였다.
 
목숨을 버릴 것을 맹세한 결사대 5,000명의 용맹은 연합군의 대군을 압도할 만하였다. 그리하여 처음 연합군과의 네 번에 걸친 싸움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반굴(盤屈)·관창(官昌) 등 어린 화랑의 전사로 사기가 오른 연합군의 대군과 대적하기에는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였다.
 
결국, 백제군은 패하고 계백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계백의 이러한 생애는 후대인들의 높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에게는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한편, 권근(權近)은 계백이 출전하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인 것이 오히려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결국 패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이며, 계백의 그러한 행동은 난폭하고 잔인무도한 것이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서거정(徐居正) 등은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해 “당시 백제가 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기에 자신의 처자가 욕을 당하지 않도록 몸소 죽이고, 자신도 싸우다가 죽은 그 뜻과 절개를 높이 사야 한다.”고 하였다.
 
더구나, 백제가 망할 때 홀로 절개를 지킨 계백이야말로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와 더불어 죽는 자”라고 칭송하였다. 그 평가는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간에 그대로 계승되어 계백은 충절의 표본으로 여겨졌다. 그 뒤 계백은 부여의 의열사(義烈祠), 연산의 충곡서원에 제향되었다.
 
 
▼ 부소산성 가는 길의 낙엽
 
▼ 영일루
1964년 부여군 흥산에 남아 있던 조선 시대의 관아문루(官衙門樓)를 이곳에 옮겨 영일루(迎日樓)라 하였다.
 
 
▼ 원곡 김기승의 글씨
 
▼ 정향 조병호의 글씨로 인빈출일(寅賓出日, 삼가 공경하면서 뜨는 해를 맞이한다)
 
 
▼ 반월루
 
 
▼ 반월루에서 본 부여 시내
 
▼ 사자루
원래 달맞이하던 송월대(送月臺) 터인데 임천군 관아정문을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때 사자루는 사비루(泗沘樓)를 잘못 쓴 글자라는 주장도 있었다고 한다. 백제의 수도 사비, ‘비(沘)’로 쓸 것을 ‘자(泚)’로 잘못 썼다는 얘기다. 1919년 의친왕 이강(李堈)이 쓴 글인데, 부여문화원에 따르면 삼국사기에는 사비성, 삼국유사에는 사자성이란 기록이 존재해 왔기 때문에 지금 처럼 사자루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고 한다.
 
 
 
▼ 낙화암과 백화정
 
▼ 과연 삼천궁녀가 이곳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을까? 백제의 왕 궁터의 규모를 볼때 삼천의 궁녀가 살기에는 너무 작다. 아마 궁녀를 비롯한 사비성의 여인들이 많이 뛰어 내렸을 것이다.
 
 
 
▼ 석정 안종원(1874~1951) 글씨
 
▼ 백화정기 : 1929년 부여군수 홍한표
 
▼ 우하 민형식(又荷 閔衡植, 1875-1947)글씨
 

 
여인의 죽음을 떨어지는 꽃으로 표현한 낙화암에서 백제의 망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그에 앞서 의자왕에 대해 알아보자.
 
의자왕은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기간 초기에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그러나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다.
 
무왕(武王)의 맏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 태자로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여륭(扶餘隆)이 615년 태어난 것이 확인되기 때문에, 의자왕은 적어도 590년대 중반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641년 무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따라서 왕에 즉위할 당시 나이는 적어도 40대 중반이 넘은 완숙한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642년 왕의 어머니가 죽자 아우 왕자의 자식인 교기(翹岐)를 비롯해 어머니 자매의 딸[母妹女子] 4명과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하였다. 이 사건은 “큰 난리가 일어났다”고 기록하였으므로 정변(政變)이라 할 만하다.
 
최근 발견된 「미륵사사리봉안기명문(彌勒寺舍利奉安記銘文)」에서는 639년(무왕 40) 당시의 백제 왕후가 사택(沙宅)씨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의자왕의 친모(親母)와 태자 임명, 사택씨와의 관련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의자왕 초기 정변이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강화하고 대외적으로 친고구려정책(親高句麗政策)으로 전환하는 기폭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이 친고구려정책을 추진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의 통일 제국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분열된 중국은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나 통일 왕조인 수·당(隋·唐)은 이웃 나라에 복속을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주변 나라는 수·당에 복속하느냐 아니면 자주적인 노선을 견지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한 것이다.
 
고구려는 이에 반발하여 수와 전쟁을 하였고, 당이 들어서자 화친(和親)을 청하는 등 국면을 타개하려 하였으나 여전히 당의 압박은 거세졌다. 이러한 시기에 집권한 의자왕은 당의 팽창주의(膨脹主義)가 한반도의 평화에 위협이 되고 고구려가 백제를 막아줄 수 있는 방파제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친고구려정책을 취한 것이다. 고구려 또한 백제의 대외정책 변화에 부응하여 대당강경파(對唐强硬派)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집권하였다.
 
의자왕이 노린 또 다른 측면은 두 나라(고구려·백제)가 화해함으로써 신라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대륙의 외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경쟁국인 신라를 고립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642년 7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城)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신라는 이를 돌파하고자 고구려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의존함으로써 국가의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백제 또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중국 통교(通交)를 위협하였다. 645년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당에 협조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공격하였다. 이는 실리정책(實利政策)을 취한 의자왕대 대외정책의 일면을 보여준다.
 
647년 신라에서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연합세력이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압하고 집권하면서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수립한 것도 신라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일본 열도에서도 645년 전횡하고 있었던 소아(蘇我)씨 일족을 주살하고 천왕의 친정체제를 강화한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당의 팽창주의에 주변 나라가 소용돌이를 치는 가운데 의자왕은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은 실리정책을 취한 것이다.
 
다음으로 의자왕은 유교(儒敎)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의자’라는 이름 자체가 유교적 색채가 짙으며, ‘성충(成忠)’·‘의직(義直)’·‘윤충(允忠) 등 신하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집권 초기에 주·군(州郡)을 순무(巡撫)하거나 죄수를 사면한 것도 유교에서 말하는 왕도정치(王道政治)와 통한다. 따라서 의자왕은 친정체제를 강화하면서 유교적 정치를 지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자왕은 이와 같이 대내외적인 개혁을 통해 자신의 친정체제를 구축하고 신라와의 전쟁에 우위를 점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당은 645년과 647∼648년 연이은 고구려의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그것은고구려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백제를 차단하여 고구려-백제-왜로 이어지는 라인을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651년당은 백제에게 신라와 싸우지 말고 협력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응분의 대가가 따를 것임을 천명하였다. 하지만 백제는 655년고구려·말갈(靺鞨)과 함께 신라 북쪽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의자왕이 당이 아닌 고구려 편에 섰던 것임을 나타내준다. 이 시기 고구려와 백제가 대규모 사절단을 야마토(大和) 정부에 보낸 사실도 세 나라의 협력 관계를 말해준 것으로 본다.
 
공교롭게도 655년 시점부터 백제 멸망에 관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붉은 말이 북악(北岳)의 오함사(烏含寺: 오합사)로 들어가 울면서 불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오함사는 전쟁에 희생된 원혼들이 불계(佛界)에 오르기를 기원하면서 세운 사찰로, 하필 이곳에서 전쟁과 관련된 말이 죽은 것은 범상치 않은 징조였다. 656년성충이 전쟁을 예언하며, 기벌포(伎伐浦)와 탄현(炭峴)을 방비할 것을 권고하며 옥사(獄死)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실제 655년을 기점으로 의자왕 정권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때 정치의 일선에 나선 인물이 군대부인(君大夫人)인 왕비이다. 왕비의 등장은 의자왕 집권 초기에 소외되었던 왕족들의 권력 장악으로 보고 있다. 이에 주목하여 지배층의 분열 혹은 공적 권력의 성장이 없었던 것을 백제 멸망의 원인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또한 태자가 부여륭과 부여효(扶餘孝)로 병기된 것에 주목하여 태자 교체와 관련된 정치 변동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신라는 김춘추의 집권 이후 당의 의관제(衣冠制) 도입과, 연호의 사용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당이 친신라정책(親新羅政策)으로 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655년 백제가 당의 통첩을 무시하자 백제를 먼저 정벌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당의 백제 정벌은 이미 659년에 준비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659년부터『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본기(百濟本紀)가 백제 멸망 관련기사로 일관한 것은 이를 대변해준다. 당이 659년 파견된 일본 사신 사카이베노무라지이하시키[坂合部連石布]를 억류한 것도 이미 당에서 전쟁을 준비하였던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60년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黃山伐)에서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하여 7월 12일사비성(泗沘城)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은 7월 13일 견고한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둘째 아들 부여태(扶餘泰)와 손자 부여문사(扶餘文思)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사비성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및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예식진(禰寔進) 묘지명(墓誌銘)에 주목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웅진방령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하였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와 같이 급작스러운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과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부여융·부여연(扶餘演) 및 대신·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에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부여륭은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백제의 고토(故土)를 신라에게 상실하여 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탐방을 마치며
 
탐방을 도와주신 공공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우장산 숲속 도서관 관계자분들에게 감사드린다.
 
백제의 31대 마지막 의자왕은 집권 15년까지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마지막 5년이 결정적이었다. 역시 처음보다 나중으로 갈수록 잘 하기가 힘들구나.
 
왕비는 왕의 권력을 남용하고 최측근 충신 좌평 성충(成忠)은 충언을 하다 감옥에 가서 죽고, 또다른 충신 좌평 흥수(興首)는 귀양가고 좌평 임자는 신라 장수 김유신의 첩보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과거의 의자왕 답지않은 행동을 하였다.
 
연이은 신라전 승리의 도취감, 정치개혁을 통한 왕권강화 자신감, 동북아 강국이라는 자만심과 내부결속 취약, 의자왕의 국가 경영의 큰 전략이 부족하여 패망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유비무환의 튼튼한 국방력과 정치인들의 국가와 국민을 위한 충정, 귀를 여는 통치자, 국익 위한 외교관계 그 무엇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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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민족문화대백과,문화재청, 네이버 지식백과, 문화유산 채널,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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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