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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흥궁.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살던 터 (201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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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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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江華郡) # 강화도령 # 용흥궁 # 철종
【여행】
(2017.11.24. 12:10) 
◈ 용흥궁. 졸지에 왕이 된 강화도령 살던 터 (2015. 6. 2)
지난 편 115년 된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 강화성당(江華聖堂)에 이어 바로 옆에 있는 강화도령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용흥궁(龍興宮)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지난 편 115년 된 한옥 성당인 대한성공회(大韓聖公會) 강화성당(江華聖堂)에 이어 바로 옆에 있는 강화도령인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용흥궁(龍興宮)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용흥궁은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하며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철종 임금이 사시던 곳이라 1853년에 강화유수(留守) 정기세(鄭基世)가 기와집으로 지은 건물로 2005년 보수 공사를 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농사꾼에서 임금으로 신분이 바뀌어 궁궐에서 살면 좋았을까? 아닐 것이다. 친근한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무서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재위 14년간 실권 없는 임금으로 허수아비처럼 살다 갔다. 33년 동안 가장 행복했던 때를 그리워하면서...
 
여행 개요다.
 
① 언제 : 2015.5.21(목)
② 어디로 : 강화도 나들길 1코스
③ 목적 : 역사 현장인 강화 보물섬을 찾아가는 여행
④코스 : 양천도서관 → 강화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진송루 → 북장대터 → 오읍 약수 → 연미정 →양천도서관
⑤소요시간 : 총 5시간 30분
 
 

 
▼ 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판
 
강화도령과 양순의 이루어 질 수 없는 첫사랑
 
철종은 한양 출생으로 강화로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며(1844년),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화도 시절 ‘양순’이란 이름의 하층계급 여인과 결혼을 생각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철종과 양순의 사랑은 이뤄지지 못 했다. 오히려 비극으로 마무리됐다.
 
천한 신분의 양순은 궁에 들어간들 무수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처지라 바로 철종의 후궁이 되는 건 불가능했다. 양순에 대한 상사병으로 괴로워하는 철종을 보다 못한 조선 왕실은 몰래 사람을 보내 양순을 독살했다. 나중에 이를 안 철종은 비탄에 잠겨 국사도 멀리한 채 황음의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다만 이 일화에는 의문점이 있는데, 신분이 천해 바로 후궁으로 삼을 수 없다면 궁녀로 삼은 뒤 승은을 내리면 된다. 당장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실제로 조선 초기의 일이기는 하나 태종의 후궁인 효빈 김씨나 세종의 후궁인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으로 정 1품 빈까지 되었다.
 
법적으로는 궁녀는 노비만이 될 수 있었으므로 천한 신분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천한 신분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입궁하지 못 했던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왕의 후계자가 귀해지던 조선 후기는 찬물 더운물 가릴 시점이 아니었다.
 
또한 농민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때 먹던 모주(막걸리)를 너무 그리워해 중전이 친정에 부탁해 구해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어쨌든 이런 일화까지 보자면 결론적으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사랑도, 자신의 삶도 모두 박탈당한 불쌍한 왕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 용흥궁 가는 길 안내
 
용흥궁(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에 대해 알아본다.
 
용흥궁은 언제, 누가 지었는가?
☞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1853년(철종 4)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하였다 그 뒤 1903년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철종은 몇 년동안 강화도에 살았나?
☞ 출생지는 한양으로 회평군 옥사로 가족과 함께 유배당한 것은 14세가 되었을 때의 일이며(1844년), 1849년에 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실제로 강화도에서 산 기간은 5년 (1844~1849)이다.
 
철종이 무식했다?
☞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4세에 천자문을 이미 배웠으며, 즉위 이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이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통감과 소학을 읽었다고 철종 본인이 직접 이야기한 바 있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아예 일자무식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로 다만 소학을 어렸을 때 읽었다가 관둬서인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뗐다고 한다.
 
실제로 조선시대 왕족들의 경우 왕족들을 교육하는 기관이 있었지만 관직에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학업에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심한 경우 자기 이름자도 제대로 못쓰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지만 왕위에 가까운 왕족일수록 영특하다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다거나 해서 쓸데없이 찍히는 일은 삼가야 했을 테니 더욱 그러했으리라 생각된다.
 
강화도령은 왜 산으로 도망갔는가?
☞ 자신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형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달아나 3일을 숨었다 한다.
 
해질 무렵 붙들려 내려왔는데도 살려 달라고 애걸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결국 중추부판사 정원용(정기세 부친)의 설득으로 결국 가마에 오른다. 이렇듯 철종의 즉위(안동 김씨의 작품)는 여러모로 즉흥적이었고 당사자도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용흥궁이란 현판글씨는 ?
☞ 용흥궁 현판은 운현궁 주인 양반의 친필이라고 한다.
 
용흥궁에 남아있는 건물은?
☞ 현존하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기비각(潛邸舊基碑閣) 1동 등이 있다.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조형되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외전(사랑채)은 정면 6칸의 팔작지붕, 내전(안채)은 정면 7칸 맞배지붕, 별전(행랑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비각 안에 철종잠저구기란 비석이 있다.
 
개방시간과 휴관 정보?
☞ 개방시간은 9시~18시, 휴관일은 없다
 
 

 
● 현장 속으로
 
▼ 행랑채 밖
 
▼ 정문과 정문 좌측에 있는 상국 정원용의 비와 유수 정기세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 현판
 
▼ 손때 묻은 대문 고리
 
▼ 정문 좌측에 있는 중추부판사 정원용 비 (鄭元容,1783:정조 7∼1873:고종 10. 정기세 부친)
 
▼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1814:순조 14 ∼1884:고종 21,) 공덕비. 정기세는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아들이며, 우의정 정범조(鄭範朝)의 아버지이다.
 
 
 

철종에 대해 알아본다.
 
일생은?
☞ 1831(순조31) ∼ 1863(철종14) : 33살로 후사 없음
 
재위 기간은?
☞조선 제25대 왕. 재위 1849 ∼ 1863. : 14년
 
이름과 조상은?
☞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로 전계대원군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 아들이다.
 
왕위를 얻게 된 경위?
☞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김조순의 딸)의 명으로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군으로서, 1844년(헌종10) 회평군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앙의식을 행한 뒤 6월 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언제 왕비를 맞았나?
1851년 (철종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구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
 
친정과 업적은?
☞ 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을 하였는데, 이듬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냥을 진대하게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절약과 탐욕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약 1,000호에 달하는 여주의 민가에 은자와 단목을 내려주어 구휼하게 하였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양을 지급하였으며, 이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조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호책에 적극성을 보였다.
 
민란 발생 원인과 수습은?
☞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이 때문에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토탄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농민들은 마침내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하여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조직 구성원이 안동 김씨 일가)이라는 일시 특별기구를 설치하고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료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후사가 없어 고종 등극
☞ 이와 같은 현상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 교주 최제우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목을 씌워 처형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천한전에 봉안되었으며,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 하나가 있어 금릉위 박영호에게 출가하였을 뿐 후사가 없었다.
 
1864년(고종1) 4월 7일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 언덕에 예장되고 능호를 예릉이라 하였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이다.
 
복원한 철종 어진
☞ 구군복 차림으로 그려진 유일한 어진이다. 철종의 나이 31세 때인 1861년에 어진화사가 시행되었는데, 한국전쟁 중 부산으로 어진들을 옮겨 놓았다가 불이 나면서 반이 타 버렸고 남은 부분을 기반으로 1987년에 복원한 것이다.
 
 

 
▼ 내전(안채) 건물
 
 
 
 
▼ 별전(행랑채) 안
 
 
 
▼내전옆의 말라버린 우물
 
 
▼담안에 왼쪽부터 안채와 사랑채가 보인다.
 
 
▼사랑채 가는 길
 
 
 
▼외전(사랑채)
 
 
 
▼외전 옆의 우물
 
 
▼비각 입구
 
 
▼비각
 
 
▼잠저구기비(潛邸舊基碑)
 
 
 
※ 식당 추천 : 우리옥 (032-934-2427, 강화읍 신문리 184)
 
 
출처; 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강화군청,위키백과
강화군(江華郡) # 강화도령 # 용흥궁 # 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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