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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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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水原華城) 수원시(水原市)
【여행】
(2017.11.27. 13:48) 
◈ 수원 화성 알아보기 (2015. 7. 9)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을 6월 23일 다녀왔다.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수원화성을 6월 23일 다녀왔다. 그날코스는 수원박물관에서 조선의 책문화란 강좌를 듣은 후 영조어필전시를 관람하였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수원화성 박물관에서 수원화성에 대한 설명과 화성축조와 관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화성행궁에서 설명과 함께 둘러본 후 화성열차를 타러 언덕을 올랐다. 화성열차를 타고 화서문, 서북공심돈,장안문,방화수류정을 거쳐 연무대가 종점으로 짭게 느껴진다. 오늘은 수원화성에 대하여 알아본다. 사진중 일부는 전에 찍은 것과 수원문화재단과 구글사진이다.
 
▶ 수원(水原)은 ?
대한민국 경기도 중남부에 있는 시이자 경기도청 소재지이다. 동쪽으로는 용인시, 서남쪽으로 화성시, 북쪽으로는 의왕시, 서북쪽으로는 안산시와 경계를 접한다. 수원시는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기초지방자치단체로 장안구, 권선구, 팔달구, 영통구 4개의 구로 구성되어 있다. 시청 소재지는 팔달구 인계동이다.
 
▶ 수원이란 명칭은 언제부터 사용?
475년(고구려 장수왕 63)에 매홀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한주(漢州) 소속의 수성군(水城郡), 940년(고려 태조 23) 수주(水州)로 승격, 1271년(고려 원종 12)에 수원도호부 승격하여 처음 수원이란 명칭이 나온다.
 
▶ 화성성곽은 왜 만들었나?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정조대왕이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침을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 화산으로 천장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쟁에 의한 당파정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긴 정치구상의 중심지로 지어진 것이며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 언제부터 몇년간 공사했나?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 채제공의 총괄아래 조심태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다.
 
▶ 성곽 배치도?
 
▶ 성곽의 4대문은?
동쪽에 창룡문, 서쪽에 화서문, 남쪽에 팔달문, 북쪽에 장안문이다.
 
▶ 성곽구간은 몇 km?
5.74km이다.
 
▶ 수원화성 공사보고서 이름은?
1801년(순조1) 9월 <화성성역의궤>를 발간하여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 비용 등 공사일체에 관한 기록을 자세히 수록하였고 그 기록에 따라 보수, 복원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수원화성의 특징은?
① 실사구시의 실천하여 새로운 장비 사용
② 계획에 의한 신도시 건설
③ 기존 성곽의 문제점 제거한 설계와 시공
④ 공사의 투명성과 고효율관리
⑤ 성곽 축조 기록성
 
▶ 언제복원했는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정조에 대하여?
① 1752년 10월 28일 (음력 9월 22일) ~ 1800년 8월 18일 (음력 6월 28일))
② 조선의 제22대 왕이며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③ 11세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은 이후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하였다.
④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 영조의 승하로 즉위하여 1800년까지 조선의 제22대 국왕으로 재위하였다. 재위 초기 홍국영에게 막강한 실권을 주는 세도 정치를 하였으나 1780년 홍국영을 실각시킨 뒤로는 친정을 하였다.
⑤ 즉위 후 정약용, 채제공, 안정복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는 동시에 노론 벽파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다. 노론이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되었다 하여 노론, 특히 벽파와의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정조는 벽파의 당수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었다.
⑥ 재위기간 중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⑦ 홍국영을 기용하여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폐단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승하 직전에 안동김씨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삼음으로써 세도 정치의 씨를 뿌렸다. 박지원 등의 진보적 문장에 반대하여 문체반정과 같은 필화 사건을 일으켰고, 서인의 성리학자이자 예학자인 우암 송시열을 존경했다.
⑧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이었으나 정조로 바뀌고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 정조는 수원 화성에 몇번 왔는가?
정조는 13회에 걸쳐 사도세자의 묘(융릉)가 있는 화산에 들렀다.
 
▶ 을묘원행정리의궤는 무엇인가?
1795년 정조 즉위 20년에 창덕궁에서 수원화성까지의 능행과 모친회갑잔치를 적은 기록물이다.
 
▶ 정조부친과 모친은 ?
부친은 사도세자. 모친은 헤경궁 홍씨로 동갑내기다.그래서 정조는 1795년 을묘년에 모친회갑잔치를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화산에서 가까운 화성행궁에서 열었다.
 
▶ 화성열차 안내정보는?
 
 
▶ 관람추천코스 : 팔달문→화성행궁→서장대→화서문→장안문→방화수류정→창룡문→봉돈→재래시장
 
 
▼ 팔달문(보물 제402호)
 
조선 후기인 1794년에 세운 화성의 남쪽 문으로, 문의 이름은 사방팔방으로 길이 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성의 4성문 중 동쪽문과 서쪽 문에 비해 북쪽문과 남쪽 문은 더 크고 화려하게 꾸몄다.
 
돌로 쌓은 무지개 모양의 문은 왕의 행차 시에도 가마가 드나들 수 있을 만큼 널찍하게 내고 위에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를 세웠다. 문루 주위 사방에는 낮은 담을 돌리고 바깥쪽으로는 반달형 옹성, 좌우에는 적대 등 성문 방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시설을 두었다.
 
옹성은 우리나라 성곽에서 일찍부터 채용되었던 방어 시설로서 서울성곽의 동대문, 전주성의 풍남문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달문의 옹성은 규모와 형태면에서 한층 돋보인다. 또한 팔달문은 도성의 문루처럼 우진각 형태의 지붕과 잡상 장식을 갖춘 문루로서 규모와 형식에서 조선 후기 문루 건축을 대표한다.
 
 
 
▼ 화성행궁(사적 제478호)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습니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96년(정조 18년~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습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 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습니다.
 
화성행궁은 567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낙남헌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으로 사라졌습니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현재는 한류열풍을 이끌고 있는 다양한 사극의 촬영명소이자 매주 무예24기 시범공연, 장용영 수위의식 등 전통행사를 선보이고 있으며 궁중복식, 전통공예 등 다채로운 체험행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 서장대(西將臺)
 
서장대는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불린다. 팔달산의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1794년 (정조 18년) 8월 11일 공사에 착수,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됐다.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장대에서는 성 전체가 한눈에 들어와, 화성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그 자리에서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위치이다. 이 곳에는 장대석으로 대를 쌓고 세 벌의 계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다 또 한 단의 대를 놓고, 또 그 위에다 2층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서장대 바로 뒤에 서노대(西弩臺)가 서있다. 서노대는 서장대의 서북쪽에 동향하여 성 한가운데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하여 높이 지은 곳으로 정팔각형꼴로 전벽돌을 쌓아놓았고 계단 부분은 트이게 하였다.
 
 
 
▼ 정조대왕상
 
 
 
▼ 화서문(華西門,보물 제403호)
 
화서문의 편액은 좌의정 채제공이 썼다. 성의 서문이다. 동남으로 행궁과 460보 떨어졌으며 묘좌(卯坐) 유향(酉向)에 자리잡고 있다.
 
홍예와 문루의 제도는 모두 창룡문과 같다. 다만 좌우의 돌 계단을 꺽어지게 해서 층을 만들었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아래 너비가 각각 9척이고, 바깥 쪽은 너비가 각각 22척 2촌이다. 홍예문 사이 좌우의 무사는 높이가 각각 18척이고 수문청은 문의 남쪽 가장자리에 있다[협도는 둘을 세웠다]. 서옹성의 제도는 동옹성과 같은데 높이는 11척, 안쪽 둘레는 76척 정문에서 36척 떨어져 있 으며 바깥 쪽 둘레는 110척이다. 안과 바깥 면 모두에 평평한 여장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방안 총혈 19개의 구멍과 활 쏘는 구멍 6개를 뚫었다. 나머지는 모두 동옹성과 같다.
 
 
 
 
▼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장안문
 
장안문의 편액은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이 썼다.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문의 안과 밖은 홍예로 되어 있다. 안쪽 홍예는 높이 19척 너비 18척 2촌이고, 바깥 쪽 홍예는 높이 17척 5촌, 너비 16척 2 촌, 전체 두께는 40척이다.
 
 
 
 
▼방화수류정(동북각루,보물 제1709호)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으로 벋어내려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감돌아 몇리를 내려가 용두(龍頭)에서 그치고서 북쪽을 향하여 활짝 열렸다. 용두란 것은 용연의 위에 불쑥 솟은 바위이다.
 
성이 이곳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게 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니, 여기야말로 실지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이다.
 
장안문을 잡아 당겨 화홍문과 이어지게 함으로써 앞뒤로 서로 마주 응하여 1면을 제압하고 있다. 그리고 절벽을 따라 성을 쌓고 바위에 누를 세우니 편액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였다. [전 참판 조윤형(曺允亨) 씀]
 
동서로 세 간인데 가운데는 온돌을 놓았고 북쪽으로 한 간을 붙이고 남쪽은 반 간(半間)을 물리었으며, 서쪽의 한 간은 또 길게 두 간을 늘리었다. 남쪽을 밖으로 물린 것은 마치 곡척(曲尺)처럼 생겨 있는데 평난간을 둘러쳤다. 그리고 위에 만(卍)자 쇄창(蔘)을 갖추었다. 온돌 4면에는 또 다시 만(卍)자 장자(障子)를 갖추었는데, 온돌의 면과 판자를 깐 면은 서로 판판하게 만들었다.
 
 
 
 
▼화홍문(華虹門)
 
화홍문의 편액은 유한지(兪漢芝)가 썼다. 화홍문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1794년 (정조 18년) 2월 28일 공사에 착수하여 8월 3일에 상량이 이루어지고, 이듬해 1795년 (정조 19년) 1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복수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소요된 건축 비용은 30,940냥 4전 3푼으로, 장안문 및 팔달문 다음으로 많이 소요되었다
 
 
 
▼연무대
 
 
 
▼창룡문
 
창룡문의 편액은 판부사 유언호(兪彦鎬)가 썼다.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봉돈
 
봉돈(烽墩)은 불을 비추어 행궁을 수비하고 성을 수비하며 주위를 정찰하여 사태를 알리는 군사 및 교통상의 신호 시설물이다. 봉돈은 화성 동문의 서남쪽에 있으며, 5개의 연기구멍을 갖추어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었다. 1796년 (정조 20년) 6월 17일에 완공되었다.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키고 하층은 석축으로 쌓고, 위는 전축으로 성벽보다 높이 쌓아 위쪽에 여장을 두었다. 내부는 3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가장 높은 곳에 5개의 횃불 구멍인 화두(火竇)를 설치하였다. 여장 3면에는 포혈 18개를, 그 아래 3면 벽성(甓城)에는 총안 18개와 누혈(漏穴) 1개를 뚫었다.
 
밤에는 불,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남쪽의 첫째 것에만 사용을 했다. 나머지 4개는 긴급한 일이 없으면 횃불을 들거나 연기나게 하지 않았다. 적이 나타나면 2개,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그리고 적과 접전시에는 5개의 봉화를 올렸다.
 
 
 
출처:위키백과,수원문화재단, 유튜브
수원 화성(水原華城) 수원시(水原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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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