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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 2편. 왜 많은 책을 썼나?- (2015.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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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南楊州市) 다산 유적지(茶山遺跡地) 정약용(丁若鏞)
【여행】
(2017.12.05. 10:30) 
◈ 다산 정약용. - 2편. 왜 많은 책을 썼나?- (2015. 12. 8)
KBS 역사채널 <그날> 정약용 편을 이미 올렸고, 오늘은 정약용의 생애와 무슨 목적으로 그 많은 503권을 책을 썼을까에 대해 알아본다.
KBS 역사채널 <그날> 정약용 편을 이미 올렸고, 오늘은 정약용의 생애와 무슨 목적으로 그 많은 503권을 책을 썼을까에 대해 알아본다. 다산 정약용하면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태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자로 정조의 화성 부친묘소로 갈 때 한강 배다리(임시 다리)와 수원화성 축조 때 거중기 등을 만들은 과학자, 정조의 신뢰를 받아 총애받던 관리, 정조 승하 후 유배가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많은 책을 저술한 학자,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의 주인공, 흑산도로 유배가서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전의 동생 등 떠오른다.
 
그러나 정약용이 1794년(정조18) 경기 암행어사(적성積城·마전麻田·연천漣川·삭녕朔寧 4개읍 담당한 어사)를 했다는 것은 미처 몰랐었다. 그 결과 보고서에서 정조의 측근인 2사람의 비리에 대하여 적었다.“연천(漣川)의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지관地官출신)은 마음대로 환곡을 나누어주고 재결을 도둑질해 먹었으니 그 죄를 유사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삭녕(朔寧)의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의원출신)은 화전(火田)에 지나치게 세를 물리고 향임들에게 뇌물을 받았습니다. 체차되어 옮긴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죄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조선왕조실록-
 
※ 과거 김양직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화성으로 옮길 때 묘자리를 봐준 지관(地官)이었고, 강명길은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주치의를 역임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포정을 알면서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2사람은 처벌받고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비위를 탄핵하였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18년동안 오래한 것은 재상였던 서용보가 해배(解配)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해배후 1819년 재등용도 서용보가 반대했다고 1822년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죄인인 그는 유배 기간 동안 왜 503권의 책을 저술했을까? 책을 쓰느라 다리를 방바닥에서 떼지 않아 구멍 난 복사뼈, 왼쪽 어깨는 마비, 울화 탓에 소화 불량과 체중 부족 및 부실한 영양, 빈혈에 중풍까지 얻으면서도 책을 썼다. 군자가 책을 지어 세상에 전하는 것은 오직 한사람이 알아 줌을 구하여 온세상 사람들의 성냄도 피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듯이 그는 학문을 갈고 닦아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 뜻을 세웠다. 현실에선 죄인이지만 다음 세상에선 제대로 평가받고자 붓 붙들고 일어나 유배지에서 많은 책을 저술했을 것이다.
 
내년 2016년은 정약용 사망 180주년의 해이다. 실사구시와 백성의 행복한 삶을 주장한 정약용은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표준 영정
 
① 1762년(영조 38)∼1836년(헌종 2). 75세
 
②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했던 정재원(丁載遠)이 아버지고 모친은 해남윤씨(海南尹氏)다. 5남(정약현,정약전,정약종,정약용,정약황) 중 4남으로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馬峴里, 지금 남양주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음사(蔭仕.과거를 보지 않고 관리로 서용敍用 됨)로 진주목사를 지냈다.
 
③ 15세에 부인 풍산 홍씨를 만나 6남 3녀(호처럼 다산 多産)를 두었으나 본인도 어릴적 걸렸던 마마(천연두)로 자식들이 많이 죽고 2남(학연, 학유) 1녀(윤창모에게 시집 감)만 살아 남았다.
 
④ 천주교 순교자 이승훈이 다산의 자형이며 황사영은 이복형 정약현의 사위다.
 
 
⑤ 태어난 생가(여유당, 與猶堂)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된 후 1986년 다시 복원하였다고 설명되어 있으나 1936년 동아일보 기사에는 집이 존재한 것이 보인다. 1800년 정조 사망후 생가로 내려와 집을 여유당이라 하였는데 여유당의 여(與)는 망설이면서 유(猶)는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라>는 뜻에서 지었다 한다.
 
다산 사망 100주기인 1936년 동아일보 기사 사진에서 마현고택이 보인다.
 
 
⑥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 남인 가문 출신이다.
 
⑦1783년 그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한강에 배다리(舟橋)를 준공시키고, 1793년에는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⑧ 청년기에 접했던 서학(西學,천주교)으로 인해 유배기간(1801~1818, 장기현과 강진현에서 유배) 동안 자신의 학문을 더욱 연마해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연구를 비롯해 경세유표(經世遺表.중앙정치의 개혁방안)·목민심서(牧民心書.지방정치의 개혁방안)·흠흠신서(欽欽新書.형옥의 개혁방안) 등 모두 503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를 편찬하였다. 이 저술을 통해서 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⑨ 유배에서 돌아와 마현에서 1822년 자신의 회갑을 맞아 자서전적 기록인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저술하였다. 아래는 무덤에 넣는 광중본을 해석한 것으로 비석에 적힌 것을 옮긴다.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이는 열수(洌水) 정용(丁鏞)의 묘이다. 본명을 약용(若鏞), 자를 미용(美庸), 호를 사암(俟菴)이라 한다. 아버지의 휘(諱)는 재원(載遠)이니, 음직(蔭職)으로 진주 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어머니 숙인(淑人)은 해남 윤씨(海南尹氏)이다. 임오년(1762, 영조 38) 6월 16일에 용(鏞)을 열수(洌水. 한강의 별칭)가의 마현리(馬峴里)에서 낳았다.
 
용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22세(1783, 정조 7)에 경의(經義. 과문 육체科文六體의 하나)로 생원(生員)이 되고, 여문(儷文)을 전공하여 28세(정조 13, 1789)에 갑과(甲科) 제2인으로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의 선계(選啓)로 규장각(奎章閣)에 배속되어 월과문신(月科文臣)에 들었다가 곧 한림(翰林)에 선입(選入)되어 예문관 검열(藝文館 檢閱)이 되고 승진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과 교리(校理),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 비변사 낭관(備邊司 郞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나가 경기 암행어사(京畿 暗行御使)가 되었다. 을묘년(1795, 정조 19) 봄에 경모궁 상호도감 낭관(景慕宮 上號都監 郞官)의 공로로 사간(司諫)에서 발탁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 同副承旨)에 제수되고, 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에 이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었다.
 
가경(嘉慶) 정사년(1797, 정조 21)에 곡산 도호부사(谷山 都護府使)로 나가서 혜정(惠政)이 많았다. 기미년(1799, 정조 23)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서 승지를 거쳐 형조 참의가 되어 원옥(冤獄)을 다스렸다. 경신년(1800, 정조 24) 6월에 《한서선(漢書選)》을 하사받았다. 이달에 정종대왕(正宗大王 = 정조)이 승하하니 이에 화(禍)가 일어났다.
 
15세(1776, 영조 52)에 풍산 홍씨(豊山 洪氏)에게 장가드니 무승지(武承旨) 화보(和輔)의 딸이다. 장가들고 나서 서울에 노닐 때 성호(星湖) 이선생익(李先生瀷)의 학행(學行)이 순수하고 독실함을 듣고 이가환(李家煥)ㆍ이승훈(李承薰) 등을 따라 그의 유저(遺著)를 보게 되어 이로부터 경적(經籍)에 마음을 두었다.
 
상상(上庠)하여 이벽(李檗)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西敎)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1787, 정조 11)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 신해년(1791, 정조 15)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생각을 아주 끊어버렸다. 을묘년(1795, 정조 19) 여름에 중국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가 오니 국내가 흉흉하여졌다. 이에 금정도 찰방(金井道 察訪)으로 보임되어 나가 왕지(王旨)를 받아 서교에 젖은 지방의 호족(豪族)을 달래어 중지시켰다.
 
신유년(1801, 순조 1) 봄에 대신(臺臣) 민명혁(閔命赫) 등이 서교의 일로써 발계(發啓)하여, 이가환ㆍ이승훈 등과 함께 하옥(下獄)되었다. 얼마 뒤에 두 형 약전(若銓)과 약종(若鍾)도 용(鏞)과 함께 체포되어 하나는 죽고 둘은 살았다. 모든 대신(大臣)들이 백방(白放.무죄로 판명되어 놓아 줌)의 의(議)를 올렸으나 오직 서용보(徐龍輔)만이 불가함을 고집하여, 용(鏞)은 장기현(長䰇縣)으로 정배되고, 전(銓)은 신지도(薪智島)로 정배되었다.
 
가을에 역적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되자 악인 홍희운(洪羲運)ㆍ이기경(李基慶) 등이 갖은 계책으로 용(鏞)을 죽이기를 도모하여 조지(朝旨. 조정의 뜻)를 얻으니, 용과 전(銓)이 또 체포당하였다. 일을 안찰한 결과 황사영과 관련된 정상이 없으므로 옥사가 또 성립되지 않았다. 태비(太妃)의 작처(酌處. 죄의 경중을 따라 처단함)를 입어 용은 강진현(康津縣)으로, 전은 흑산도(黑山島)로 정배되었다.
 
계해년(1803, 순조 3) 겨울에 태비가 용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상신(相臣) 서용보(徐龍輔)가 그를 저지하였다. 경오년(1810, 순조 10) 가을에 아들 학연(學淵)의 명원(원통함을 호소함)으로 방축 향리(放逐鄕里)를 명하였으나 당시 대계(臺啓)가 있음으로 인하여 금부(禁府)에서 이를 시행하지 않았다. 그 뒤 9년 만인 무인년(1818, 순조 18) 가을에 비로소 향리로 돌아왔다. 기묘년 겨울에 조정 논의가 다시 용(鏞)을 등용하여 백성을 편안히 하려 하였는데, 서용보가 또 저지하였다.
 
용(鏞)이 적소(謫所)에 있은 지 18년 동안에 경전(經典)에 전심하여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ㆍ《역(易)》ㆍ《춘추(春秋)》 및 사서(四書)의 제설(諸說)에 대해 저술한 것이 모두 2백 30권이니, 정밀히 연구하고 오묘하게 깨쳐서 성인의 본지(本旨)를 많이 얻었으며, 시문(詩文)을 엮은 것이 모두 70권이니 조정에 있을 때의 작품이 많았다. 국가의 전장(典章) 및 목민(牧民)ㆍ안옥(按獄)ㆍ무비(武備)ㆍ강역(疆域)의 일과, 의약(醫藥)ㆍ문자(文字)의 분변 등을 잡찬(雜簒)한 것이 거의 2백 권이니, 모두 성인의 경(經)에 근본하였으되 시의(時宜)에 적합하도록 힘썼다. 이것이 없어지지 않으면, 혹 채용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의(布衣. 벼슬 없는 선비)로 임금의 지우(知遇)를 입어, 정종대왕(正宗大王=정조)의 총애와 가장이 동렬(同列)에서 특이하였다. 그래서 전후에 상사(賞賜)로 받은 서적ㆍ내구마(內廐馬)ㆍ문피(文皮. 호표(虎豹)의 가죽)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 등은 이루다 적을 수 없을 정도다. 기밀(機密)에 참여하여 소회가 있으면 필찰(筆札)로 조진(條陳)하도록 하여 모두 즉석에서 들어주셨다. 항상 규장각(奎章閣)ㆍ홍문관(弘文館)에 있으면서 서적을 교정(校正)하였는데 직무의 일로 독려하고 꾸짖지 않았다. 밤마다 진찬(珍饌)을 내려 배불리 먹여주고 무릇 내부(內府)의 비장된 전적을 각감(閣監)을 통하여 보기를 청하면 허락해 주었으니, 모두 특이한 예우이다.
 
그 사람됨이 선(善)을 즐기고 옛것을 좋아하며 행위에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침내 이때문에 화를 당하였으니 운명이다.
 
평생에 죄가 하도 많아 허물과 뉘우침이 마음속에 쌓였었다. 금년에 이르러 임오년(1822, 순조 22)을 다시 만나니 세상에서 이른바 회갑으로,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이다.
 
마침내 긴치 않은 일을 씻어버리고 밤낮으로 성찰(省察)하여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회복한다면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는 거의 어그러짐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씨(丁氏)는 본관이 압해(押海)이다. 고려 말기에 백천(白川)에 살았는데, 우리 조정이 개국(開國)한 뒤로 한양(漢陽)에 살았다. 처음 벼슬한 할아버지는 교리(校理) 자급(子伋)이다. 이로부터 계승하여 부제학(副提學) 수강(壽崗), 병조 판서 옥형(玉亨), 좌찬성(左贊成) 응두(應斗), 대사헌 윤복(胤福), 관찰사 호선(好善), 교리 언벽(彦璧), 병조 참의 시윤(時潤)이 모두 옥당(玉堂)에 들어갔다. 그 뒤로는 시운이 비색(否塞)하여 마현(馬峴)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 3대를 모두 포의(布衣)로 마쳤다. 고조의 휘(諱)는 도태(道泰), 증조의 휘는 항신(恒愼), 조부의 휘는 지해(志諧)인데 오직 증조께서만 진사를 하셨다.
 
홍씨(洪氏)는 6남 3녀를 낳았는데 3분의 2가 요사(夭死)하였고 오직 2남 1녀만 성장하였다. 아들은 학연(學淵)과 학유(學游)이고, 딸은 윤창모(尹昌謨)에게 출가하였다. 집 동산의 북쪽 언덕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자리를 잡으니, 평소에 바라던 대로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荷主之寵 임금의 총애 입어
入居宥密 근밀(近密)에 들어갔네
爲之腹心 임금의 복심(腹心) 되어
朝夕以 조석으로 모셨도다
荷天之寵 하늘의 총애 입어
其愚衷 우충(愚衷)이 열리었네
精硏六經 육경(六經)을 정연(精硏)하여
妙解微通 미묘한 이치를 깨치고 통했도다
人旣張 소인이 치성해지니
天用玉汝 하늘이 너를 옥성(玉成)시켰네
斂而藏之 거두어 간직하고
將用矯矯然遐 장차 훨훨 노니련다
 
⑩ 결혼 60주년 기념식날 죽었고(1836년 음력 2. 22) 묘소는 생가 여유당 위에 있다. 1910년 문도공(文度公)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⑪ 탄생 250주년이 되는 2012년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 독일소설가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유네스코가 선정한 인물로 선정되었다.
 
 

 
▼ 남양주 정약용의 묘소 안내문
학문적 관심은 수기안인(修己安人,자신을 수양하여 남을 편안하게 해 준다)에 있다고 적혀있다.
 
 
▼생가 위 유산(酉山)에 부인 홍씨와 합장묘이다.
 
▼사당(문도사)
 
스캔한 팜플릿
 
상기의 관직시절 내용중 상양군수 강명길은 삭녕군수 강명길로 조선 왕조실록에서 확인된다.
 
 
 
▼경기도 남양주 다산 유적지(생가, 묘소, 사당 문도사, 기념관과 문학관) 위치
 
다산 유적지 배치도
 
경기도 남양주 다산유적지는 무료 관람이며 대중교통으로 연결된다.
 
▼ 다산 유적지가는 56번 연결 버스
 
 
★ 수원화성 방문기는 여기를 누르세요.
 
 
출처: 민족문화대백과,네이버지도,네이버 지식백과, 송찬섭, 한국표준영정,다산유적지 홈페이지,조선왕조실록,문화재청,문화유산채널,김영환그림
남양주시(南楊州市) 다산 유적지(茶山遺跡地) 정약용(丁若鏞)
【여행】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 다산 정약용. - 3편. 다산 문화관에서 찾은 것- (2015. 12. 9)
• 다산 정약용. - 2편. 왜 많은 책을 썼나?- (2015. 12. 8)
• 다산 정약용. - 1편, 역사채널 그날 - (2015.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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