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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의 고려궁궐터와 강화산성 (2015.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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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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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산성(江華山城) 강화군(江華郡) # 고려궁지
【여행】
(2017.11.24. 13:06) 
◈ 아픈 역사의 고려궁궐터와 강화산성 (2015. 6. 4)
누구나 여행 후기를 잘 쓰고 싶어 한다. 재미나게 쓰고 싶다. 나도 마찬가지다. 여행 글쓰기 대한 강의를 듣고 여행작가분과 동행하는 강화도 여행후기다. 115년 된 한옥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강화도령이 살던 용흥궁 후기에 이어 오늘은 제3편 고려궁지(高麗宮址.궁궐터)와 강화산성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누구나 여행 후기를 잘 쓰고 싶어 한다. 재미나게 쓰고 싶다. 나도 마찬가지다. 여행 글쓰기 대한 강의를 듣고 여행작가분과 동행하는 강화도 여행후기다. 115년 된 한옥성당인 대한성공회 강화성당과 강화도령이 살던 용흥궁 후기에 이어 오늘은 제3편 고려궁지(高麗宮址.궁궐터)와 강화산성에 대하여 포스팅한다. 아시다시피 몽골의 침략으로 개성(송도)을 버리고 강화로 천도하여 세운 고려궁궐은 39년간 몽골에 항쟁한 역사의 장소다. 강화산성은 고려궁궐을 방비하기 위해 쌓은 성곽이다. 현재 강화도 인구수가 약 7만 명인데 그 당시 전국에서 사람들을 모았다 해도 지금의 인구정도로 추정한다.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인 원나라에 작은 섬에서 무려 39년간 싸우고 버티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까?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용흥궁에서 고려궁지로 가는 길에 죽산 조봉암(61살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는 ‘간첩죄’로 처형당함)이 다녔던 강화초등학교가 눈에 보인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니 승평문(昇平門)이 보인다. 고려궁의 정문이라고 적혀있다. 몽골과 싸운 고려궁지라고 하는데 그 당시 유적은 하나도 없어 안타깝다. 왜냐면 몽골과 화친하면서 쌓은 궁궐과 성벽을 허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려궁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좌측 길로 가니 고려궁지 안의 외규장각 건물이 보인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문화재를 약탈하고 불태운 장소로 2003년 복원하였다.
 
고려궁지에서 북문으로 향한다. 가로수가 벚나무로 봄에 고려산 진달래와 함께 볼거리라 작가가 귀띔해준다. 드디어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鎭松樓)에 도착해 성곽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도서관에서 준비해 준 샌드위치를 맛있게 먹고 잠깐 휴식을 취했다. 휴식 후 진송루에서 성곽 안쪽을 따라 올라가니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문화재 복원은 고증을 거쳐 원형에 가깝도록 성곽을 복원해야 나중에 후회가 적다 .북장대 건물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북산 봉우리까지 걸어서 올라온 수고에 비하면 그 전망은 꽤 뛰어난 편이다. 북장대 터에 오르니 강화읍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갯벌과 한강하구와 그 너머 북녁땅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멋진 풍광에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여행 개요다.
 
① 언제 : 2015.5.21(목)
② 어디로 : 강화도 나들길 1코스
③ 목적 : 역사 현장인 강화 보물섬을 찾아가는 여행
④코스 : 양천도서관 → 강화도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진송루 → 북장대 → 오읍 약수터 → 연미정 →양천도서관
⑤소요시간 : 총 5시간 30분
 
 

 
고려궁지(사적 제133호. 지정면적 7,534㎡)에 대해 알아본다.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이 궁은 1270년 몽골과 화친하여 송도로 환도할 때에 몽골 측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모두 허물었다. 조선시대에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여 1631년(인조 9)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 관아건물인 명위헌(明威軒), 이방청(吏房廳), 외규장각(2003년 복원)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외침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민족의 저력이 흐르는 국난 극복의 역사적 현장이다.
 
고려 궁궐터는 사적지다. 궁궐 사적지 면적이 2300평이면 궁궐 면적으로는 너무 협소한 것 같다.
 

 
▼ 강화 고려궁지 안내판
 
▼ 현재 고려궁지내 건물 배치도
 
▼ 궁궐 정문인 승평문
 
 
※ 고려 왕릉 중 남한에 있는 것은 39년간 항쟁하던 강화시대 왕릉으로 확인된 21대 희종의 <석릉>, 23대 고종의 <홍릉>, 22대 강종비(원덕태후)의 <곤릉>, 24대 원종비(순경태후)의 <가릉> 4기가 있다.
 
 
▼ 문서를 보관하던 외규장각(外奎章閣)
 
※ 1866년 병인양요는 병인박해 당시 프랑스 선교사의 처형을 문제 삼아 조선을 개항시키고자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사건이다. 정족산성의 전투에서 조선군에 패한 프랑스군은 퇴각하며 외규장각 도서를 비롯한 각종 문화유산을 약탈해 갔다.
 
 
▼ 병인양요 때 47세의 대원군 사진으로 5개의 ‘병부주머니’를 차고 있는데 병인양요 당시 군대의 동원을 지휘했다는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부’는 조선시대에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부신(符信)으로 발병부(發兵符)의 준말이다. 이 병부는 지름 7.5㎝, 두께 0.6㎝의 둥글고 납작한 나무패로 색깔은 흑색인데 글자를 쓴 나무패를 2조각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반원형의 목판 우반부(右半符)는 관찰사·절도사·제진이 보관하고 좌반부(左半符)는 궁중에서 보관했다. 군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 임금이 교서와 함께 좌반부를 내리면 지방관은 이것을 우반부와 맞추어보고 틀림없다고 인정될 때 군대를 동원했다.
 
 
 
※ 식당 추천 : 왕자정 묵밥 (032-933-7807.강화읍 북문길)
 
 
강화산성에 대해 알아본다.
 
고려 때 강화도를 방어하기 위해서 쌓은 산성으로,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곳과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 등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현재 강화읍 동쪽의 성벽은 없어졌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벽은 잘 보존되어 있다. 몽골군의 침입,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수많은 외세 침략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다.
 
1232년(고종 19) 6월에 최우(崔瑀)는 몽골군 침입에 맞서 강화로 천도하면서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하였다. 다만 이때 왕궁과 도성 시설을 모두 갖추지는 않고, 1234년 1월부터 송도(松都)의 것과 비슷하게 도성과 궁궐, 각 관청을 건립하였다.
 
산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하여 1250년에 둘레 약 9㎞로 쌓은 토성인데, 선원면의 토성터가 이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중성에는 8곳의 성문이 있었는데, 모두 송도에 있던 성문의 이름을 빌려와 동쪽의 선인문(宣仁門), 서쪽의 선기문(宣祺門),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북쪽의 북창문(北昌門), 동남쪽의 장패문(長覇門), 서남쪽의 광덕문(光德門), 서북쪽의 선의문(宣義門), 동북쪽의 창희문(彰熙門) 등으로 불렀다.
 
외성은 중성을 수비하려고 1233년부터 쌓기 시작한 뒤, 1235년 12월에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여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고서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3만 7,070척의 길이로 쌓았다. 토성인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강화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위시설이자 강화로 천도한 고려 정부가 39년 동안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었다.
 
1259년 고려가 몽골과 강화하자, 몽골은 그 조건으로 주자(周者)와 도고(陶高) 등을 보내 내성을 헐고 외성까지도 모두 헐었다. 당시 역사(役事)는 몽골의 지나친 독촉으로 인해 동원된 백성의 고통이 매우 심하였다고 한다.
 
강화산성은 조선 초기에 다시 축조했는데, 이때 고려 때의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였다. 그러나 1637년(인조 15)에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청나라 군사에 의해 다시 파괴되어, 1677년(숙종 3)에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고려 때의 내성 규모로 크게 고쳐 쌓았다. 1709년(숙종 35)에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한 뒤에도 조선 말기까지 계속 보수하였다. 이때 성벽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성벽 위에 낮게 쌓은 여장(女墻)도 두었지만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1966년에 서문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1974년에는 남문 문루를 복원하였으며, 1975년에는 성곽을 보수하였으며, 1977년에 북문(진송루)을 복원하였다. 지금도 성곽을 복원 중이다.
 
 
▼ 북문인 진송루
 
 
▼ 북송루 안내문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1232년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기고 궁궐을 지을 때 도성도 함께 쌓았는데 개성의 성곽과 비슷하게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졌다. 이중 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 원래는 흙으로 쌓았으나 1677년에 현재와 같은 석성으로 이루었다. 성의 길이는 7,122m이며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 2개의 수문, 2개의 성문장청이 있었다.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다.
 
 
▼ 성벽에 원총안(멀리 있는 적을 쏘는 구멍)과 근총안(가까운 적을 쏘는 구멍), 여장, 옥개석이 보인다
 
▼ 성곽 용어
 
① 여장(女墻)과 총안(銃眼) 및 옥개석(屋蓋石,지붕돌) : 여장은 방어시설로 성곽 위에 담장처럼 설치된 것이고 총안은 총을 쏠 수 있게 만든 구멍으로, 멀리있는 적을 향한 구멍(원총안,遠銃眼)이 2개, 가까운 적을 향한 구멍(근총안,近銃眼)이 1개이며 옥개석은 집의 지붕처럼 여장을 보호하는 지붕돌
② 타구(垛口)):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곳.
③ 암문(暗門) : 성 깊숙한 곳에 적이 찾지 못하도록 설치를 해서 사람이나 가축이 통과하고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일종의 비밀의 문.
 
 
 
▼ 성벽이 지진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축성했다.
 
▼ 청룡靑龍(동), 백호白虎(서),주작朱雀(남), 현무玄武(북)의 깃발이 보인다
 
▼ 동쪽을 나타내는 청룡 깃발이다.
 
▼ 도서관에서 나눠준 샌드위치
 
▼ 성곽 복원공사 중이라 올라갔다 내려갔다.
 
▼ 복원공사 현장으로 지금 쌓기도 힘든데...
 
▼ 북장대(北將臺) 터에서 본 풍광
 
 
▼ 갯벌을 간척하여 농토로 바꿨으니 참 대단하다.
 
▼ 멀리 남장대(南將臺)도 보인다.
 
▼ 강화 나들길 1코스 표지판
 
※강화나들길 1코스안내
강화터미널 → 성공회 성당 → 용흥궁 → 고려궁지 → 북문→ 북장대→ 오읍약수→ 연미정 → 갑곶돈대
 
▼ 무너진 성벽으로 예산이 나올 때 복원공사를 한다.
 
 
▼ 오읍약수로 가는 숲길
 
 
▼ 오읍약수(五泣藥水)
고려 고종이 몽골을 피해 강화로 천도하여 축성할 때 극심한 가뭄으로 일꾼들이 목이 말라 쓰러지므로 고종이 친히 북산에 올라 기도하니 한 조각구름에서 벼락이 쳐서 그곳에서 샘이 솟았다 하여 <벼락바위의 약수>라 하였다. 오읍약수(五泣藥水)라는 이름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임금이 울고, 백성이 울고, 벼락바위까지 울었다고 하여 생겼다고 한다.
 
 
 
출처: 만족문화대백과,경향신문, 네이버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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