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지식놀이터 ::【고재완의 지식창고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2015년
2015년 12월
2015년 12월 29일
2015년 12월 28일
2015년 12월 27일
2015년 12월 14일
2015년 12월 13일
2015년 12월 12일
2015년 12월 11일
2015년 12월 10일
2015년 12월 9일
2015년 12월 8일
2015년 12월 7일
2015년 12월 1일
2015년 11월
2015년 11월 30일
2015년 11월 29일
2015년 11월 28일
2015년 11월 27일
2015년 11월 26일
2015년 11월 13일
2015년 11월 7일
2015년 11월 6일
2015년 11월 5일
2015년 11월 2일
2015년 11월 1일
2015년 10월
2015년 10월 31일
2015년 10월 29일
2015년 10월 27일
2015년 10월 26일
2015년 10월 25일
2015년 10월 24일
2015년 10월 23일
2015년 10월 22일
2015년 10월 21일
2015년 10월 20일
2015년 10월 16일
2015년 10월 15일
2015년 10월 14일
2015년 10월 13일
2015년 10월 12일
2015년 10월 11일
2015년 10월 10일
2015년 10월 9일
2015년 9월
2015년 9월 26일
2015년 9월 25일
2015년 9월 24일
2015년 9월 23일
2015년 9월 22일
2015년 9월 20일
2015년 9월 19일
2015년 9월 18일
2015년 9월 11일
2015년 9월 9일
2015년 9월 8일
2015년 9월 1일
2015년 8월
2015년 8월 25일
2015년 8월 16일
2015년 8월 3일
2015년 8월 1일
2015년 7월
2015년 7월 30일
2015년 7월 29일
2015년 7월 27일
2015년 7월 22일
2015년 7월 20일
2015년 7월 16일
2015년 7월 9일
2015년 7월 6일
2015년 7월 2일
2015년 7월 1일
2015년 6월
2015년 6월 26일
2015년 6월 16일
2015년 6월 15일
2015년 6월 9일
2015년 6월 8일
2015년 6월 5일
2015년 6월 4일
2015년 6월 2일
2015년 6월 1일
2015년 5월
2015년 5월 30일
2015년 5월 28일
2015년 5월 27일
2015년 5월 26일
2015년 5월 22일
2015년 5월 21일
2015년 5월 19일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방문기 (2015.5.19)
2015년 5월 17일
2015년 5월 15일
2015년 5월 13일
2015년 5월 11일
2015년 5월 9일
2015년 5월 8일
2015년 5월 6일
2015년 5월 4일
2015년 5월 2일
2015년 4월
2015년 4월 27일
2015년 4월 24일
2015년 4월 22일
2015년 4월 18일
2015년 4월 11일
2015년 4월 8일
2015년 4월 5일
2015년 3월
2015년 3월 24일
2015년 3월 6일
2015년 2월
2015년 2월 21일
2015년 2월 20일
2015년 2월 12일
2015년 2월 11일
2015년 2월 7일
2015년 1월
2015년 1월 28일
2015년 1월 27일
2015년 1월 25일
2015년 1월 11일
2015년 1월 7일
2015년 1월 2일
about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내서재
추천 : 0
철원군(鐵原郡) 철원평화전망대 # 제2땅굴
【여행】
(2017.11.21. 10:46) 
◈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방문기 (2015.5.19)
강원도 철원의 도피안사, 월정리역과 노동당사에 이어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를 소개합니다.
※ 철원은 북한과 접경지역으로 안보견학을 신청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은 도피안사, 노동당사 ,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 3곳이며 그 외는 관광안내소에 반드시 신청하여 안내공무원 인솔하에 출발하셔야 합니다.
(문의처 ① 철의삼각전적관 매표소 ☎ 033-450-5558 ② 승리전망대 매표소 ☎ 033-450-5900 ③ 백마고지 매표소 ☎ 033-450-5683이며 매주 화요일은 휴무)
 

 
● 제2땅굴
 
제2땅굴은 북한이 판 남침용 땅굴로 북한에서 군사분계선 까지 2,400 m, 군사분계선에서 우리 쪽으로 1,100 m 총 3.500 m를 남북대화하면서도 파 내려왔습니다.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땅굴은 한국군 초병이 경계근무 중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시추작업으로 땅굴소재를 확인한 후 수십일간의 끈질긴 굴착 작업끝에 1975년 3월 24일 한국군 지역에서는 두번째로 발견한 북괴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입니다.
 
땅굴이 있는 지점은 견고한 화강암층으로 지하 50m~160m 지점에 있는 이땅굴의 총 연장은 3.5 km 인데 그 중 군사 분계선 남쪽으로 1.1km 까지 파내려왔고 그 규모는 높이 1.6 ~ 2m의 아치형 터널로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된 북괴의 엄청난 도발 현장입니다
 
현재 이 땅굴은 철의 삼각전적지 개발 계획에 따라 국민의 경각심을 고취시키는 안보관광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 북한이 남침용 땅굴을 팠다는 3가지 증거
① 다이너마이트 장전공의 방향이 북에서 남쪽으로 향함
② 갱도 배수로의 방향이 남에서 북으로 향함 ☞ 반대면 물이 고여 갱도작업 불가
③ 남한과 북한의 굴착공법이 다름
 
 
헬멧을 꼭 쓰고 출입합니다.
 
 
 
 
제2땅굴 추모위령비
 
 
 
 
● 평화 전망대
 
중부전선 최북단에서 북한을 볼 수 있는 철원 평화전망대는 필승교회 옆에 위치하며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철원평화전망대는 3층 건물로 2007년 준공하였으며, 3층 전망대는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하여 궁예 도성의 성곽, 평강고원과 북한 선전마을을 전망할 수 있으며, 초정밀 망원경시설과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 축소판이 있어 민족 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고 들을 수 있는 곳으로 관광객에게 편의를 위해 모노레일카를 운영하며 주변의 비경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평화전망대 앞의 비무장 지대안에는 하나의 역사가 잠들어 있는데 태봉 궁예 궁터로 일제강점기 때 찍은 사진에 의하면 궁예궁터 앞에 석등과 탑도 있었으나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짐작해볼 도리도 없습니다. 이들 유물은 남북의 어떤 도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채 긴 세월 방치돼왔기 때문입니다.
 
 
 
전망대까지 모노레일 3분, 걸어가면 8분이므로 저는 걸어 왕복했습니다.
 
 
모노레일 이용료가 성인 2,000원(단체 1,500원) 좀 비싸네요.
 
 
월정리에 있던 철의 전망대(현재 두루미 전시관)대신 이곳에 평화전망대를 새로 지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보는 궁예 도성터
 
​성의 위치는 현재 비무장지대인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이며, 성축 년대는 서기 903 ~ 904년경으로 추정됩니다. 궁예는 효공왕 8년(서기 904년)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치고 서기 905년 송악에서 철원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당시에 도선의 도참설에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지속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년밖에 유지하지 못한다”는 설이 있었는데 궁예는 이를 무시하고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고 이곳에다 903년부터 궁전을 크게 짓기 시작하고 외성, 내성도 튼튼히 축조하기에 이르렀으며, 10여개의 외곽성도 함께 구축하면서 세력을 확장합니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이중 축조된 특이한 성인데, 밑 부분은 석축으로 상단은 토축으로 외성의 둘레는 4,370m. 내성은 577m의 큰 규모로 내성에는 궁예만이 사용하였던 어수정과 석등 등 많은 유적이 있었으나 오랜 풍상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현재 휴전선 비무장지대내에 유지가 일부 남아 있다고 하나 출입통제 지역으로 확인하기 어렵답니다.
 
 
전시관 일부
 
 
언덕에 있는 필승교회
 
 
교회밑에 있는 평화의 성모상
 
 
내려가는 우측 길에 있는 통일 대불입니다.
 
 
노란 애기똥풀
 
 
1968.5.30일 박정희 대통령 방문 기념비로 내려가는 길 좌측에 있습니다.
 
 
동송 저수지로 모내기 위해 철원지역은 물이 가득 가득합니다.
 
 

 
궁예(弓裔, ?~918년)
 
신라 제47대 헌안왕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후궁 사이의 소생이라는 설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 제45대 신무왕의 숨겨진 아들이자 장보고의 외손이라는 설 등이 있다.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왕이 그를 죽이도록 명하였는데, 유비(乳婢: 젖먹이 비녀)가 그를 구해(이 때 떨어지는 궁예를 받다가 손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함) 몰래 길렀다고 한다. 이에 대해 궁예가 왕위 다툼에 희생되었던 왕자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고려시대에도 궁예의 부왕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구사일생한 경위가 극적이라는 점 등을 들어 왕자설을 의심하면서 정쟁(政爭)에서 패배하여 몰락하였던 유력한 진골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10여세에 세달사(世達寺: 고려시대 興敎寺)에서 출가하였고, 스스로 법호를 선종(善宗)이라고 하였다. 훗날 미륵불을 자칭하고, 경전을 짓고 강설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승려로서의 경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지방의 민중들을 중심으로 참회의 실천을 중시하였던 진표(眞表) 이래의 미륵신앙을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궁예가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던 초기에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의 도래를 내세워 민중들을 포섭하였으리라고 한다. 장성해서는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등 일반 승려들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고 하는데, 불교보다는 현실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에 보다 관심을 갖게 됨에 따른 변화였을 것이다.
 
891년 세달사를 떠나 죽주(竹州: 지금의 안성시 이죽면)의 반신라적인 호족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 892년에는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호족 양길(梁吉)의 부하로 활약하였다. 894년 10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입성하여 3,500명의 병력을 확보하였다. 이들을 14대(隊)로 편성하고, 금대(金大)·검모(黔毛)·흔장(昕長)·귀평(貴平)·장일(張一) 등을 사상(舍上: 부장(部長)을 말함)으로 삼았다. 궁예는 사졸들의 신망을 얻어 곧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대규모의 병력을 확보하고 부대 편제를 정비하였으며, 지휘권을 확립하는 등 명주에서 자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895년 8월 태백산맥을 넘어 한산주(漢山州) 관내 10군현을 차지하는 등 군세를 떨쳤다. 이에 패서(浿西: 예성강 이서 황해도) 지역의 호족들 중 귀속하는 자들도 많았다. 896년에는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의 유력한 호족 왕건 가문이 귀속하였다. 이렇게 패서 지역 호족들의 세력을 모으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패강진(浿江鎭) 호족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896년 철원에 도읍하였던 궁예는 898년 7월에는 도읍을 송악(개성)으로 옮겼다. 이때 패서도(浿西道) 및 한산주 관내 30여성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천도를 통해 왕건 가문과 연결된 패서 호족을 비롯한 호족들과의 결합을 굳게 하였을 것이다. 11월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시작하였는데, 팔관회 개최는 구복(求福)과 전쟁에서 죽은 장병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하생한 미륵불을 만나기 위한 공덕 가운데 팔관회의 계율 준수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를 그의 미륵신앙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899년 7월에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남한강 일대에 큰 세력을 이루었던 양길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이를 계기로 900년 10월 남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통일신라의 9주 중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되었던 명주·삭주·한주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901년에는 고려(高麗)를 건국하였다. 이때의 고려는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왕건의 고려와 구별하여 흔히 후고구려라고 부른다. 궁예가 국호를 고려라고 하였던 것이나 당(唐)에 군대를 요청해 고구려를 멸망케 한 신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였던 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호응을 기대한 것이었다. 또한 900년견훤(甄萱)이 백제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후백제를 건국하였음을 의식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후삼국시대가 개막되었다.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하였다. 광평성을 설치하고, 병부(兵部)를 비롯하여 여러 관부들을 두었는데 신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정광(正匡)을 비롯한 관등도 마련하였다. 이로써 중앙정치조직이 정비되었다. 광평성은 서열 제1위의 행정관부이면서 한편으로는 화백(和白)의 전통을 이은 기구로서 국가의 중대사에 대한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던 관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당시 궁예정권이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갖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905년 7월 궁예는 철원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이미 903년 철원 일대의 산수를 살폈고, 904년 7월 청주(淸州: 지금의 청주) 인호(人戶) 1천인을 철원으로 옮기는 등 사전 준비가 있었다. 왕건 가문의 본거지였던 송악을 떠나 자신이 처음 도읍하였던 철원으로 되돌아갔던 것은 패강진 호족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정치적 기반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청주인들을 옮긴 것도 그러하다. 이 해에 연호를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04년 공주의 장군 홍기(弘奇)가 투항했다. 공주는 이후 후백제와 후삼국 쟁패의 요지가 되었다. 905년 8월에 죽령의 동북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고, 906년상주 사화진(沙火鎭: 지금의 상주)을 차지함으로써 신라를 직접 위협할 수 있는 거점을 마련하였다.
 
905년에는 패서 13진을 분정(分定)하였다. 이때 패서 호족들의 지배 구역에 대한 모종의 조정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패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 확립되자 그 외곽의 대동강 유역의 호족들도 귀속하였다.
 
909년 왕건을 나주에 파견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나주 일대를 둘러싼 후백제와의 공방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지만,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백제를 배후에서 위협하는 효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2/3를 차지하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한편 대외적으로 오월(吳越)이나 후량(後粱)과 국교를 맺는 데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한 동아시아의 신흥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던 거란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던 반면 발해와는 소원하였다.
 
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고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큰 아들을 신광(神光)보살, 막내 아들을 청광(靑光)보살이라고 하여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신격화하였다. 복장이나 행차에 있어 나름대로 미륵불의 장엄을 꾸미기도 하였다.
 
불교 경전 20여권을 지었고, 강설하기도 하였는데, 경전에는 자신이 하생한 미륵불이며 자신의 치세가 미륵불이 하생한 이상세계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불교 경전 20여권의 존재를 통해 기존의 불교 교단과는 상관없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궁예는 국왕이자 미륵불로서 성속(聖俗)의 권능을 오로지 하게 되었다. 지배자가 신(神) 혹은 그 후손이나 대리인으로 통치하는 형태를 신정(神政)이라고 하고, 개인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는 것을 전제주의라고 한다. 이 점에서 궁예는 신정적 전제주의를 추구하였다고 규정할 수 있다.
 
미륵불로서의 전지(全知)함을 드러내기 위해 고안된 것이 미륵관심법(彌勒觀心法)이었다. 관심(觀心)은 본래 마음의 본바탕을 바르게 살펴본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부인들의 비밀을 알 수 있다고 내세웠다. 그리고 반란의 음모를 적발하는 데에도 이용하였다. 왕건도 이로 말미암아 모반의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점에서 미륵관심법은 관리들을 감찰하기 위하여 인사를 담당하는 내봉성(內奉省)에 사정 기능을 더하고, 내군(內軍)을 설치하여 신변 경호와 함께 군의 동향을 감시하도록 한 정치조직의 변화와 짝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914년 연호를 정개(政開)로 바꾸었다. 915년에는 부인 강씨(康氏)가 비법(非法)을 많이 행한다고 간쟁하였다. 이에 대해 부인은 물론 보살로 삼았던 두 아들마저 죽였던 사실을 보면, 당시 조정에서 그에 대한 비판을 넘어 도전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정적 전제주의는 그 속성상 그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인물들에 의하여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허월(許越) 등 명주 출신, 종간(宗侃) 등 승려들, 은부와 이흔암(伊昕巖)과 같은 전문적인 군인 출신, 청주 출신 등이 그 지지세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반면 동궁기실(東宮記室)을 지냈던 박유(朴儒) 등 유학자들, 궁예의 강설을 사설(邪說)·괴담(怪談)이라고 비난하였다가 철퇴에 맞아 죽었다는 석총(釋聰) 등 기존 교단의 승려들, 패서 호족을 비롯하여 정치적 권력을 나누고자 기대하였을 호족들이 그에게 반대하였다. 청주 출신이나 전문적인 군인 출신들 중에서도 이에 속하였던 예가 찾아진다. 또 전쟁을 수행하고 신정적 전제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들로부터도 반발을 샀다.
 
태봉정권 말엽에는 궁예의 멸망과 왕건의 등장을 예언하는 도참도 나타났다.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백발노인에게서 산 옛 거울에 그러한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 4인의 마군 장군이 왕건을 추대하고 궁예를 왕위에서 축출하였다. 그는 미복으로 도망쳐 산곡 간에 숨어 있다가 부양(斧壤: 지금의 평강)에서 백성들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 철원 안보관광 안내장
 
 
 
 
출처: 철원군청,네이버,민족문화대백과
철원군(鐵原郡) 철원평화전망대 # 제2땅굴
【여행】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 서울 둘레길 4-2구간. 양재시민의 숲 ~ 사당역 (2015.5.21)
• 제2땅굴과 평화전망대 방문기 (2015.5.19)
• 철원 월정리역과 노동당사 방문기 (2015.5.17)
▣ 커뮤니티 (참여∙의견)
내메모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로그인 후 구독 가능
구독자수 : 1
▣ 정보 :
여행 (보통)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 참조정보
백과 참조
 
목록 참조
 
외부 참조
 
▣ 참조정보
©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