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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南楊州市) 다산 유적지(茶山遺跡地) 정약용(丁若鏞) # 애절양
【여행】
(2017.12.05. 11:14) 
◈ 다산 정약용. - 4편 , 다산의 애절양- (2015. 12. 10)
다산 문화관에 이어 오늘은 다산 기념관이다.
다산 문화관에 이어 오늘은 다산 기념관이다. 다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건물이다. 관직에 있을 때 다산은 거중기나 녹로를 고안해 수원화성을 짓는데 기여했다.그 뿐만아니라 정조가 수원갈때 한강에 배다리로 배를 타지 않고 건너는데 기여했다. 유배지의 다산은 그곳에서 보고 들은 민초들의 처절한 삶을 표현했다. 남자로 태어나 남근(男根)을 자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을 1803년(순조3)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로 적었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오죽했으면 저랬을까? 먹고 살기 힘들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이건 아니다. 지금 같으면 이런 사연을 SNS로 올릴텐데... 갈수록 심하게 수탈하니 홍경래의 난(1811년)이 일어났다. 민심이 천심이거늘 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것이다. 관리는 백성을 죽어라 쥐어짜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다산기념관에는 다산의 친필 서한 간찰(簡札) · 산수도 등과 대표적 경세서인 「목민 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으며 특히 실물 크기의 4분의 1 과 2분의 1크기의 거중기와 녹로가 눈길을 끈다. 1997년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수원성)을 쌓을 때 역학적인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리는 데 사용되어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었던 거중기와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일종의 크레인인 녹로는 바로 실학정신에 바탕한 다산의 설계로 제작된 기계이다.
 

 
다산 기념관
 
 
 
▼ 정약용의 힘찬 필적이다. -명가필보에서-
 
 
 
● 이미 2편에서 다산 정약용에 대하여 기술하였지만 수학기(修學期),관직기(官職期),유배기(流配期), 해배기(解配期) 4 단계로 나눠 설명한다.
 
1단계는 수학기, 출생 이후 과거를 준비하며 지내던 22세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부친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 경상도 예천 및 진주 등지로 따라다니며 부친으로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15세가 되던 1776년에는 이익의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 때 부친의 벼슬살이 덕택에 서울에서 살게 되어,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이가환(李家煥)과 학문의 정도가 상당하던 매부 이승훈(李承薰)이 모두 이익의 학문을 계승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자신도 그 이익의 유서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익은 근기학파의 중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어린 시절부터 근기학파의 개혁이론에 접했다고 하는 것은 청장년기에 그의 사상이 성숙되어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의미를 던져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정약용 자신이 훗날 이 근기학파의 실학적 이론을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게 된 단초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되고 있었다.
 
 
 
2단계 관직시절은, 1783년. 22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이후부터 1801년에 발생한 신유교난(辛酉敎難)으로 체포되던 때까지를 들 수 있다. 그는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서울의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하였다.
 
이 때 ≪대학 大學≫과 ≪중용 中庸≫ 등의 경전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그리고 1789년에는 마침내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희릉직장(禧陵直長)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이후 10년 동안 정조의 특별한 총애 속에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경기암행어사(京畿暗行御史),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 곡산부사(谷山府使), 병조참지(兵曹參知), 부호군(副護軍), 형조참의(刑曹參議) 등을 두루 역임했다. 특히, 1789년에는 정조가 화성행궁으로 갈때한강에 배다리(주교. 舟橋)를 설계하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그는 이벽(李檗)·이승훈(자형) 등과의 접촉을 통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입교(세례명 요한) 후 그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교회 내에서 뚜렷한 활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입교는 자신의 정치적 진로에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였다. 당시 천주교 신앙(평등 사상)은 신분제를 유지하려는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인식되어 집권층으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천주교 신앙 여부가 공식적으로 문제되어 수절의(遂絶意)를 제출했다. 이후 그는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혐의로 여러 차례 시달림을 당해야 했고, 이 때마다 자신이 천주교와 무관함을 변호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사망(1800년)한 후 1801년의 천주교 교난 때 유배를 당함으로써 중앙의 정계와 결별하게 되었다.
 
 
 
☞ 곡산 부사 스토리
곡산부사로 부임할 당시 부임지인 곡산에 이르렀을 때 이계심이란 자가 백성들의 고통 12가지를 적어 바치며 엎드려 자수하였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는 전임 부사가 부당하게 세금을 징수하자 천여명의 백성들을 인솔하여 관청에 들어와 항의하다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 사람이었다. 당장 체포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냥 보내주면서 그에게 말하길 “수령이 선정을 베풀지 못하는 이유는 폐정을 보고도 수령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마땅히 돈을 주고라도 사야 할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일신의 안전을 살피지 않고 항의하는 이계심도 훌륭한 백성이지만 이런 사람을 알아주는 다산도 그에 못지않은 훌륭한 목민관이다.
 
수원 화성 자료로 올린다.
 
조선의 계획 신도시로 탄생한 수원화성
 
거중기 -수원화성에서-
 
녹로 -수원화성에서-
 

 
3단계 유배시절은 , 1801년 유배부터 다시 향리 마현으로 귀환하게 되는 1818년까지의 18년간 이다. 그는 교난이 발발한 직후 경상도 포항 부근에 있는 장기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생한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의 여파로 다시 문초를 받고 전라도 강진(康津)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강진 유배기간 동안 학문 연구에 매진했고, 이를 자신의 실학적 학문을 완성시킬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의 강진 유배기는 관료로서는 확실히 암흑기였지만, 학자로서는 매우 알찬 수확기였다고 할 수 있다. 많은 문도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 저술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중국 진나라 이전의 시대에 발생했던 원시 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해서 성리학적 사상체계를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사회현실을 반성하고 이에 대한 개혁안을 정리하였다. 그의 개혁안은 ≪경세유표≫·≪흠흠신서≫·≪목민심서≫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이들 저서는 유학의 경전인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와 사회개혁안을 정리한 것으로 가장 주목받고 있다. 정약용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연구서들을 비롯해 경집에 해당하는 것이 232권,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른다고 한다. 그 대부분이 유배기에 쓰여졌다.
 
 
▼ 경세유표
 
▼ 1936년 발간한 여유당 전서
 

 
● 유배지 강진을 사진으로 봅니다. 꼭 가봐야겠습니다.
 
처음에는 강진읍 주막과 보은산방등에서 거처하다 1808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 거주하던 주막집 사의재 (四宜齋. 생각,용모,언어,행동 4가지를 모두 마땅하게 해야겠다는 방)
 
 
▼ 1803년 쓴 군정(軍政)의 문란을 나타낸 애절양 (절양絶陽은 남성 생식기를 자른다는 뜻)이란 시다.
 
* 군정은 군사행정인 군적(軍籍)과 군사재정의 근원인 군포(軍布)에 관한 일을 총칭하는 말로 힘없고 돈없는 백성들은 탐관오리들의 저지르는 부정부패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직하면 남자가 생식기를 자르겠는가?
* 당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병역을 대신하여 군포(軍布)를 내게 되는데, 관리들이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이미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을 군적에 올려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들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기막힌 현실을 두고 노래한 것이다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서
 
 
 
▶ 다산초당(茶山艸堂)
 
①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면 5칸, 측면 2칸 기와 주택.
② 사적 제107호.
③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④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다산 4경인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초당 올라가는 길로 얼마나 다녔을까?
 
초당
 
초당 현판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차 끊이는 바위인 다조(茶竈)
 
 
⑥ 아래는 2013년 김영환 화백이 1812년, 1939년 그림을 보고 재구성한 다산초당 팔경도이다. 다산은“담을 스치고 있는 작은 복숭아나무(拂墻小桃:불장소도), 문발에 부딪히는 버들가지(撲簾飛絮:박렴비서), 봄 꿩 우는 소리 듣기(暖日聞雉:난일문치), 가랑비에 물고기 먹이 주기(細雨飼魚:세우사어), 아름다운 바위에 얽혀 있는 단풍나무[(楓纏錦石:풍전금석), 못에 비친 국화꽃(菊照芳池:국조방지), 언덕 위의 대나무의 푸르름(一埠竹翠:일오죽취), 골짜기의 소나무 물결(萬壑松波:만학송파)”의 현상을 다산팔경(茶山八景)으로 삼고 시로 읊었다.
 
※기와 집이 아닌 그냥 초가집으로 복원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혜장스님과 교우하던 백련사
 
 
4단계는, 1818년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하게 되는 1836년까지의 기간이다. 그는 이 시기에 향리에 은거하면서 ≪상서 尙書≫ 등을 연구했으며,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매씨서평(梅氏書平)의 개정·증보작업이나 아언각비(雅言覺非),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 등이 이 때 만들어졌다.
 
 
1822년 쓴 자찬 묘지명 -집중본-
 
 
 
위치
 
무료입장인 다산유적지 안내도
 
 
 
 
출처: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문화유산채널,네이버지식백과, 정약용홈페이지,네이버지도,유튜브, 역사채널그날
남양주시(南楊州市) 다산 유적지(茶山遺跡地) 정약용(丁若鏞) # 애절양
【여행】 고재완의 여행을 떠나요
• 다산 정약용. - 5편, 정약용 묘와 사당을 둘러보고- (2015. 12. 11)
• 다산 정약용. - 4편 , 다산의 애절양- (2015. 12. 10)
• 다산 정약용. - 3편. 다산 문화관에서 찾은 것- (2015.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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