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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사∙개화가사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2019.07.18. 01:42 (2019.07.18. 01:38)

【학습】애국(愛國)하는 노래

'애국하는 노래'는 가사의 4음보 형식을계승한 개화기 시가문학으로서 개화기의 문학의 흐름을 보여 주는 제재로선정되었다. 이 노래는 <독립 신문>에 발표된 대표적 개화기 애국가사 가운데 하나이다.
아시아의대조선국이 자주 독립국임이 분명하다.
애야 에야 애국하세.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세.
 
분골쇄신이 되도록 임금께 충성하고나라를 사랑하세
우리 정부를 받들고 우리 국민을 도와주세
 
고루한 의식에서 깨어나 부국강병하고 진보하세
(그렇지 못하면) 남의 천대 받게 되니 후회 막급 없이 하세
 
마음을 합쳐서 한 마음 되어 서구 열강의동양 침략을 막아보세
온갖 산업(사농공상)에 힘을 다하여 사람마다 생업에 힘쓰세
 
남녀 가릴 것 없이 입학하여세계의 학식을 배워보자.
교육을 받아야 개화가 되고 개화가 되어야 사람이 되네
 
태극기를 높이 달고 전세계에 거리낌없이나아가세,
산이 높고 물이 깊게 우리 마음에 맹세하세.
 

 

1. 요점 정리

• 저자 : 리필균(생몰연대 미상)
• 별칭 : 애국가
• 연대 : 1896년
• 갈래 : 개화 가사(4. 4조)
• 성격 : 계몽적, 교훈적, 설득적, 교술적, 목적문학적 애국가사
• 어조 : 설득적이고 계몽적인 남자의 목소리
• 표현 : 청유형과 열거법이 쓰이고, 직설적으로 표현, 반복법도 사용됨.
• 사상 : 개화, 계몽 사상
• 율격 : 외형률, 음수율, 4·4조의 4음보
• 제재 : 애국하는 방법
• 주제 : 개화하여 애국하자, 개화 계몽을 통한 애국
• 구성 :
1연 : 자주 독립국가의 역설
2연 : 충군 애국의 정신
3연 : 부국 강병의 필요성
4연 : 대동 단결에 의한 서구 열강의 무력 침략 견제
5연 : 신교육을 통한 개화
6연 : 자주 독립과 국위의 선양
 
• 특징 : 각 절마다 '합가'라는 후렴구 형식을 취하고 있음, 여기서 합가는모두 함께 노래하는 대목을 뜻한다. 즉 합가는 한 사람이 선창을 하는형식으로 만들어 가창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후렴과는 달리 각 연마다다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앞소리와 뒷소리가 있는 민요의 가창방식을 본받은 것으로 보인다. 청유형 어미, 열거법, 선후창( 민요의가창 방식의 하나. 한 사람이 선창하면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후렴따위를 이어 부르는 방법)
• 출전 : 독립신문 1권 15호
 

2. 내용 연구

아시아의 대조선국이 자주 독립국임이 분명하다.
(합가 : 여러 사람이함께 부르는 노래) 애야에야 애국하세. 나라위해 목숨을 바치세. - 자주 독립 국가에 대한 신념
 
분골쇄신[뼈가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도록]이 되도록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세
(합가)우리정부를 받들고 우리 군면(국민)을 도와주세 - 충군애국의 정신
 
깁흔 잠(고루하고폐쇄적인 봉건 의식에 빠져 있는 사회 제도나 상태/ 무지몽매를 말하고, 작가의 비판 의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서 깨어나 부국강병(부유한나라와 강한 군대라는 뜻으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한다는뜻)하고 진보하세[서세 동점에 위기를 느끼고, 문명 개화를 통해 시급히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기를 것을 역설한 것이다. '깁흔 잠'은 봉건적 사회제도나 그런 의식을 의미한다. '깁흔 잠'과 대조적인 의미는 '개화'이다.]
(합가)(그렇지못하면) 남의 천대(업신여기어푸대접함) 받게 되니 후회 막급[이미잘못된 뒤에 아무리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음] 없이 하세 - 개화·각성에의한 부국 강병
 
마음을 합쳐서 한 마음 되어[합심과일심은 '한 마음'이라는 뜻으로 반복법에 해당] 서세동점(서구 열강의 동양 침략)을막아보세
(합가)사농공상 힘을 다하여[사농은봉건 시대의 네 가지 계급으로 선비, 농부, 공장, 상인을 말함. 온갖산업에 힘을 다하여 국민 각자가 자신의 생업을 가져야 할 것을 주장또는 사농공상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단결하여] 사람마다 생업[자신의일]에 힘쓰세 - 대동단결에의한 반외세·근대화
 
남녀 가릴 것 없이 입학하여 세계의 학식을 배워 보자.[신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으로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여성 교육까지 주장한 것에서 작자의 진보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고 '세계 학식'은 다분히 서양의 학문을 의식한 것으로볼 수 있다.]
(합가)교육을받아야 개화가 되고 개화[사람의지혜가 열려 새로운 사상, 문물, 제도 따위를 가지게 됨]가 되어야 사람이 되네 - 교육을통한 개화
 
팔괘[8가지의 괘. 주역(周易)의 산목(算木)에 그려진 8가지의 점상(占象)인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등으로 나중에는 운명 판단의 기본 원리이며 점(占)·역(易)·복점(卜占)의 뜻으로 변하였다. '사기(史記)'의 '삼황기(三皇紀)'에 의하면 팔괘는 중국 최초의 제왕 복희(伏羲)가 천문지리를 관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뒤에 이 괘 2개씩을 겹쳐 중괘(重卦) 64패를 만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되었다] 국기(태극기)를 높이 달고 육대주(전세계)에 횡행(거리낌없이) 나아가세,[세계를향한 힘찬 도약, 세계의 강대국이 되자는 의지를 표현한 구절이다 국력신장을 통한 국제적 지위 향상.]
(합가)산이 높고 물이 깊게 우리 마음에 맹세하세. - 자주독립과 국위 선양
 
• 깁흔 잠을 어셔 깨여 부국강병 진보하세: 서세 동점에 위기를 느끼고, 문명 개화를 통해 시급히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기를 것을 역설한 것이다. '깁흔 잠'은 봉건적 사회제도나 그런 의식을 의미한다. '깁흔 잠'과 대조적인 의미는 '개화'이다.
• 사농공샹 진략하야 사람마다 자유하세: 온갖 산업에 힘을 다하여 국민 각자가 자신의 생업을 가져야할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 남여 업시 입학하야 세계 박식 배화 보자: 신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 것으로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던여성 교육까지 주장한 것에서 작자의 진보적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고 '세계 학식'은 다분히 서양의 학문을 의식한 것으로볼 수 있다.
• 팔괘: 8가지의 괘. 주역(周易)의 산목(算木)에 그려진 8가지의 점상(占象)인 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 등으로 나중에는 운명 판단의 기본 원리이며 점(占)·역(易)·복점(卜占)의 뜻으로 변하였다. '사기(史記)'의 '삼황기(三皇紀)'에 의하면 팔괘는 중국 최초의 제왕 복희(伏羲)가 천문지리를 관찰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뒤에 이 괘 2개씩을 겹쳐 중괘(重卦) 64패를 만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점치게 되었다.
• 팔괘 국긔 놉히 달아 륙대주에 횡행하세: 세계를향한 힘찬 도약, 세계의 강대국이 되자는 의지를 표현한 구절이다.
 
• 민요의가창 방식
 
① 선후창 : 선창자는 후렴을 제외한 노래를 하고 후창자는 후렴을 부르는방식(논매기 노래, 한 오백년)
② 교환창 : 후렴이 없는 노래를 나누어 부르는 방식 또는 후렴구는 같이 부르고나머지 의미 부분을 나누어 부르는 방식(성주풀이)
③ 독창 : 노래의 모든 부분을 혼자서 부르는 방식(창부타령)
④ 제창 : 노래의 모든 부분을 여럿이 같이 부르는 방식(고성 일하기 소리 중에서베틀 소리)
 

3. 이해와 감상

대내적으로는 '반봉건'을, 대외적으로는 '반외세'를 추구하는 내용으로 지은이는 학부주사라는 사실만 알려진 이필균이독립신문에 투고한 애국가사로, 개화 가사의 일반적인 특징인 4·4조의전통적인 율격을 취하고 있다. '잠을 깨자, 서세동점을 막자, 자유하자...'등의다소 직설적이고 생경한 시어가 사용되었지만, 개화기의 형편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각 절마다 '합가'라는 후렴 형식을 취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애국하는 노래'의 율격은 4음절을 한 마디로하는 음보가 둘씩 둘씩 짝을 이루었다. 이처험 글자의 수효를 규칙화하는형식은 시조나, 가사 등 전통적 시가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색으로서, 창가의 7·5조도 이러한 음수율적 규칙성을 보여 준다. 이런 형식이새로이 생겨난 것은 서양 음악의 전래와 변화의 욕구가 작용한 결과일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새로운 변화만 있었던 것은아니다. '애국하는 노래'는 '합가'라는 것을 매 연마다 되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여럿이 함께 노래하라는 작사의 의도를 나타낸다. 이러한 형식은모내기 등의 노동 민요에서 한 사람이 앞 소리를 매기고, 나머지 사람들이뒷소리를 받는 것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고도볼 수 있다.
 
이 노래가 신문에 투고된 독자의 작품이라는것도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전환기인 이 시기에신문과 잡지가 문학 작품의 유통에 매우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노래말을 지어 투고하는 독자의 시가관이 계몽과 민족 수호의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던 그 당시의 정신적 동향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주제는 의미심장하다. 격동의 전환기에서민족 자주와 교육 개화를 노래로 강조하였던 삶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이 작품을 이해·감상하는 핵심으로 볼 수 있다.
 

4. 이해와 감상

 
개화기 애국 계몽 문학은 민중을계몽하고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는 의도로 지어졌다. 이 시기에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수호하고근대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노래는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위해서는 교육으로 문명 개화를 이루어야 하며, 부국 강병을 통한 외세배격으로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노래의 특징적인 점은 '합가' 부분이다. 동일한 내용을 반복하는 후렴과 달리 각 연마다 다른 내용으로되어 있으며, 한 사람이 선창을 하면 여러 명이 후창을 하는 형식으로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가창 방식은 앞소리와 뒷소리가 있는 민요의가창 방식을 본받은 것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5. 심화 자료

작품개관 :
 
'애국하는 노래'는 가사의 4음보 형식을계승한 개화기 시가문학으로서 개화기의 문학의 흐름을 보여 주는 제재로선정되었다. 이 노래는 <독립 신문>에 발표된 대표적 개화기 애국가사 가운데 하나이다. 이 노래는 개화 의식만을 고취한 것이 아니라외세의 침략을 경계해야 한다는 내용까지 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학습 활동'에서는 이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노래를 통해 알 수 있는당대의 시대적인 과제와 그에 대한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활동과이 노래의 형식적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한 활동을 마련하였다. 또 이노래와 같이 계몽적, 교훈적 의도가 강하게 드러난 문학을 조사하고, 시대적 배경의 공통성을 파악하며, 현재에는 이러한 계통의 문학이 어떻게활용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표현방식과 내용
 
이 노래는 글자의 수를 네 자로맞추었으며, 4음보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군이나 하듯이 규칙적으로낭송되는 이 노래는 그 표현 방식부터 개화로의 바쁜 마음을 열정적으로나타내고 있다. 또 '잠을 깨자, 서세 동점을 막자, 자유하자, 세계 학식을배워 보자, 개화하자, 육대주에 횡행하자' 등의 표현은 생경한 느낌을주며, 봉건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부국 강병, 신학문, 세계에로의 진출' 등 개화기의 목표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각 절마다 '합가' 라는후렴 형식을 취하고 있음은 온 국민의 참여를 외치는 형식으로서 특이하다. 여러 사람이 함께 노래하는 부분인 합가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이 작품은창가로 분류하기도 한다. 또 '합가' 는 앞소리와 뒷소리가 있는 민요의가창 방식을 본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개화 가사
 
개화기는 우리 민족사에서 격동과충격의 시기였다. 안으로는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의 갈등이 심화되고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첨예화되어 통치 질서의 안정을 기할 수 없는상태였고, 그로 인해 급격히 밀려드는 열강의 세력들에 대해서 능동적으로대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의 타개를 위하여개화, 계몽 운동이 전개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문학도 모든역량을 총동원하여 그 대열에 합류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역할을 담당하였던 갈래가 바로 가사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사는 이미전대의 가사는 아니었고, 시대적 요구에 부응해서 형식이 짧아지고 노래부르기에 적합한 형태로 변모된 개화 가사였다. 창가는 바로 이 개화가사를 모태로 하여 시대적 이념을 빠른 속도로 전파시킬 수 있는 형태로발전한 것으로, 개화 가사와 신체시를 연결시키는 징검다리 구실을 수행했던것이다. '애국하는 노래' 역시 이러한 가사의 특성을 살려, '계몽'과 '개화'를 목적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1 이 노래의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해 보자.
 
(1) 노래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당대의 시대적 과제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시대상과 관련하여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역할을 하였는지 이해시키기 위해 설정하였다. 개화기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과제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주권을 수호하고근대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제가 노래에는 어떻게표현되었는지 살펴보게 한다.
 
예시답안 :
 
이 노래에서는 부국 강병을 이루고, 서구 제국의 동양 침략을 막아내며, 교육을 통해 개화하고, 독립 국가를이룰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노래에 담겨진 내용을 통해 볼 때 외세의침략에 맞서 주권을 수호하고, 근대적인 국가의 개화한 국민이 됨으로써부강한 근대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2)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위해 어떻게 하자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제목과 연관지어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시대상과 관련하여문학이 어떻게 사회적 역할을 하였는지 이해시키기 위해 설정하였다.(1)에서 학습한, 이 노래를 통해 알 수 있는 시대적 과제를 바탕으로생각하게 한다. 이를 위해 어떻게 하자고 하는지는 청유형으로 진술된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게 한다.
 
예시답안 :
 
개화를 하여 부국 강병을 이루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며, 교육을 통해 개화를 이루자는 것이 이 시의주요 내용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한다.
 
2. 이 노래의 형식적 특징과 관련하여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작품은 노래하기 유형의 문학이라고할 수 있다. 어떻게 가창되었는지 알아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을 통해 개화 가사의 독특한형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합가' 라는 가창 방식은 여럿이함께 부르는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예시답안 :
 
이 노래의 특징은 '합가' 부분을통해 짐작할 수 있다. 가창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이 노래는 한 사람이선창을 하면 여러 명이 합창으로 후창을 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2) 이 노래의 형식을 조선 시대의 시조나가사와 비교하여 어떤 점에서 다른지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개화 가사로 이어지는전통의 계승을 자연스럽게 인식할 수 있다. 시조의 길이는 3행으로 제한되어있으며, 가사는 연속체로 길게 이어질 수 있다고 학습한 내용을 환기시킨다.
 
예시 답안 :
 
이 노래는 시조에 비해 길며, 가사에 비해 짧다. 그리고 시조나 가사는 음절의 수가 일정하지 않아노래를 부르면서 지루하게 않게 하며, 일종의 '멋' 을 갖고 있는데, 이 노래는 4음절을 규칙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3. 이 노래는 계몽적, 교훈적 의도를담은 노래로 '~하세' 와 같은 청유형 종결 어미로 끝맺고 있다. 이 점과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전통적인 문학의 갈래 중, 이 노래와같이 계몽적, 교훈적 의도를 담은 노래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자. 그리고 이러한 노래가 나타나게 된 시대적 배경의 공통점은 무엇인지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대개 사회 질서가 혼란에 빠졌거나혼란이 수습되는 국면에서는 새로운 제안이 등장하기도 하고, 새로운사회에 대한 기대가 나타나는 법이다. 역사적 전환기의 문학이 이러한성격을 가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 역사에서는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나, 전쟁이나 외세의 침입으로 국난을 맞이하는 시기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이는 문학적 차원에서는 교술 문학이 성행하던 시기와 연결된다.
 
예시답안 :
 
조선 전기의 악장 문학은 흔히교술 갈래로 분류되는 바, 이 노래들은 주로 교훈적 의도를 담고 있다.'용비어천가' 가 대표적인 악장 작품인데, 여기에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함께 임금이 갖추어야 할 통치의 태도가 드러나 있다. 그 밖의 다른악장 문학들도 새로운 도읍의 탄생을 찬양하거나 임금의 덕을 예찬하는경향을 보여 주고 있어, 계몽적, 교훈적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2)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는 이러한유형의 노래로 학교 교가, 회사 사가, 단체의 단가 등을 들 수 있다. 학교의 교가와 이 노래를 비교하여 보고, 어떤 점이 같고 다른지 설명해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문학의 사회적인기능을 생각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학교 교가를 조사하고, 노래와 비교하게한다. 교가는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길러 주고 그 학교의 학생으로서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만들어졌음을 이해시킨다.
 
예시답안 :
 
교가를 조사하여 가사만을 적게한다.
 
가사의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어B생각하게 한다.
 
개화기시가 형성의 시대적 배경
 
한국 근대 문학의 출발을 1894년김홍집 등 개화파에 의하여 단행된 갑오개혁 전후기에 두고 있음은 이제까지의통념이다. 이에 대한 이설(異說)로 조선 후기의 영, 정조까지 소급하려는기도가 있었으나, 이것이 정설로 확립된 단계에 이르지는 못한 것 같다. 적어도 이런 문제 제기가 객관적 타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그 확실한논거로서 작품이 밑받침돼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근대화 운동' 이란자체의 전통에 대한 비판과 자각에서도 형성되지만, 그보다 외래적 영향을받아 이루어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국과 일본을매개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구 문화는 세찬 저항을 받아 전통 사상과의심한 갈등을 보였다. 아직도 '새로움'의 수용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않았던 시대성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간에 한말기에이르러 문호를 개방하고 물밀 듯 밀려온 서구 문화나 사상은 그 이전까지의생활 습속과 사고 방식까지 바꿔놓았다. 이 시기는 1890년대에 해당되며, 문학적 차원에서도 근대화 과정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의기독교 사상의 전래와 신교육 기관의 설립 및 신문, 잡지의 간행 등근대적 전초기를 밟지 않은 것은 아니나, 문학적으로 그 바탕을 형성한것은 자주 독립과 애국 사상을 고취하고 근대 문명을 예찬한 애국, 독립기와개화 가사 및 창가 등과도 같은 개화기 시가에서도 가능했다.
 
갑오개혁을 전후한 근대 초기는전통 사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새로움'의 문학이 대두되기 이전에는본격적인 문예 사조는 확립되지 못했다. 서구 문화나 사상조차도 간접적으로중국과 일본을 매개로 수용되었으나 그들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채로겉돌고 있었다.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구사상과 제도를 무조건 배척해야만했던 시기로, 어떤 외래 문화나 사상을 구현할 기반도 갖추지 못하였다.'새로움'에 대한 강렬한 의욕과 함께 전통 사상을 배제하고 서구 문화나사상을 수용해야만 했다.
 
개화기 시가는 그 장르적인 면에서도본격적인 새로운 형태의 문학이 확립됐다기보다는 과도적 현상으로서애국, 독립가와 개화 가사와 창가와 신체시만이 시도되었다. 이러한형태의 시가들은 개항기 이래 유입된 서구 문화나 사상을 바탕으로 문명개화를 주제로 했거나, 아니면 외세에 대한 강렬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고있었다. 한마디로 개화기 시가는 한국 근대시의 출발을 의미하는 초기현상으로 전통 사상과 외래 사상의 심한 갈등적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는것으로, 기독교 및 해외 문학의 유입과 신문, 잡지의 발행, 신교육 기관의설립 등 전환기의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다.(출처 : 김학동, '한국 개화기의 시가 연구')
 
(1) 이 노래가 쓰여진 시대적 상황이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설명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개화기의 민족적 요청인 반봉건, 반외세가 개화 가사에 드러난다는 것을 내용을 통해 확인하도록 하고이러한 내용이 작품 속에 반영되어 있는 양상에 주목하여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개화기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대내적으로 반봉건(개화, 계몽), 대외적으로는 반외세(애국)였다. 이노래에는 개화 의식을 고취하는 것 외에도 외세의 침략을 경계하는 내용까지담고 있다. 그리고 '잠을 깨자, 서세 동점(西勢東漸)을 막자, 자유하자, 세계 학식 배워 보자, 개화하자, 육대주에 횡행하자' 등의 시어는 생경함이느껴지지만, 한편으로 개화기의 형편과 소망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이 노래에서 작가가 강조하는 내용을신문 사설 형식으로 써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이 노래에서 작가가 강조하는내용은 개화 의식을 고취와, 외세에 대한 경계이다. 이 두 가지를 강조하는내용을 담아 신문 사설 형식으로 작성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하는 것은 외세를 타파하고 봉건 제도를 혁파하는 것이다. 근대화를통하여 우리 사회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위해서는 온 국민이 합심하여 개화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려는 태도가필요하다.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이익에만 빠지지 말 것이며 옛 것에 사로잡혀새 문물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런 태도를취할 때에 우리나라가 한 걸음 앞서서 전 세계에 힘을 떨칠 수 있을것이다.
 
독립신문 (獨立新聞)
 
1896년 창간되었던 우리 나라 최초의 민영 일간지.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으며, 격일간지로 출발해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창간경위〕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에 들른 박영효(朴泳孝)로부터 대역부도죄(大逆不道罪)가 1895년 3월 1일자로 사면되었다는 사실과 정권을 장악한 개화파 동지들이 자신의 귀국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1895년 12월 26일 귀국하였다.
김홍집(金弘集) 내각은 서재필을 외부협판으로 내정하고 입각을 교섭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정부의 외곽에서 개화정책을 국민에게 계몽하는 사업이 시급함을 강조하고 입각을 거절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의 주요 원인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된 때문으로 보고 갑오경장의 성패 여부도 얼마나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갑오경장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는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단행하면서도 일본측의 방해로 그들의 신문은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의 개혁정책을 국민에게 알려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대중매체로서의 계몽적 신문을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특히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은 1883년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 漢城旬報≫의 창간 준비작업을 한 경험이 있었다.
또 그 자신이 서양 여러 나라를 여행한 견문을 통해 신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서재필과 유길준은 1896년 1월 하순에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새 신문의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3월 1일 창간하기로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김홍집 내각도 이 신문 창간사업을 적극 지지하고 신문사 창설 자금과 서재필의 생계비를 정부 예산에서 지출하기로 결정해, 승인서를 서재필에게 교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서재필에게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면서 그를 10년간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유길준도 일본으로 망명해 ≪독립신문≫은 창간 준비단계에서 지원하던 큰 배후세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아관파천에 의해 몰락한 것은 친일적 개화파뿐이었으므로 신문 창간사업을 지원할 세력은 여전히 건재하였다.
특히, 박정양(朴定陽)·안경수(安去壽)·한규설(韓圭卨)·김가진(金嘉鎭)·김종한(金宗漢) 등을 비롯한 건양협회(建陽協會)의 잔여 세력과 민영환(閔泳煥)·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이채연(李采淵) 등을 비롯한 정동구락부(貞洞俱樂部) 세력이 서재필을 지원, 보호해 신문 창간계획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
아관파천 뒤 수립된 박정양 내각도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재필이 신정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한, 김홍집 내각이 승인한 신문 창간계획을 재확인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정양 내각은 서재필의 요청에 따라 유길준이 작성한 승인서를 재확인해 주었다.
정부 예산에서 신문사 설립자금으로 3000원과 서재필의 개인 생계비와 가옥 임대를 위해 1,400원을 지출하였다. 서재필은 정부가 지출한 자금으로 일본 대판(大阪)에서 인쇄기와 국문활자·한문활자·영문활자 등을 구입하였다.
그리고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에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김홍집 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출발해 박정양 내각과 서재필의 합작으로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모두 4면이었다.
제3면까지는 국문판으로 제4면은 영문판으로 편집해 주 3회[화·목·토요일]의 격일간지로 발행되었다. 제1면에는 대체로 논설과 신문사고[광고], 제2면에는 관보·외국통신·잡보, 제3면에는 물가·우체시간표·제물포 기선출입항시간표·광고 등을 실었다.
영문판 ≪인디펜던트 The Independent≫는 사설(editorial), 국내 잡보(local items), 관보(official gazette), 최신전보(latest telegrames), 국내외 뉴스요약(digest of domestic and foreign news), 통신(communications), 의견 교환(exchanges) 등으로 구분해 편집하였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 있으면서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맡았다. 주시경(周時經)은 조필(助筆)로 국문판의 편집과 제작을 담당하였다.
 
〔발 전〕
 
≪독립신문≫은 창간 때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될 때까지 4단계를 거쳐 발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1기는 1896년 4월 7일 이후부터 1896년 7월 2일까지로,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의 신문 논조는 주로 국민 계몽이었다.
이 시기에는 정부에 대해서 매우 협조적이었다. 정부 시책을 국민들에게 해설하고 전달해 주었으며, 정부도 이 신문이 제시한 제안을 채택하는 데 열의를 보였다. 당시 큰 문제로 대두했던 의병을 회유하는 데 있어서도 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였다. 논설은 온건했지만,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변화에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제2기는 1896년 7월 4일부터 1898년 5월 11일까지로, 독립협회의 창립 이후부터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출국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독립협회가 전개한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하였다.
1897년 1월 1일부터는 영문판을 분리해 4면의 독립된 신문으로 발행하고, 크기도 2배로 확대하였다. 주 3회 발행하는 격일간지 영자신문은 제1면에는 광고(advertisement)·외신(telegram), 제2면에는 사설, 국내 잡보 및 관보(government gazette), 제3면에는 각 부처 소식(departmental news)과 독자 통신(corrrespondence), 단편적 논설(notes)·공고(notice), 제4면에는 광고를 실었다.
중국 상해와 제물포에 지국을 설치하고 통신원을 두었다. 이 때는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격화되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는 친러수구파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신문의 논조는 1897년 봄부터 정부를 날카롭게 공격하는 변화를 보여 탐관오리들을 서슴없이 고발하였다.
특히, 1897년 8월부터 러시아가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보내어 내정 간섭을 자행하고 각종 이권을 침탈하자 날카롭게 비판으로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정부로부터 탄압이 가중되어 1897년 12월 중순에는 폐간 위험에까지 직면하였다. 1897년 12월 말에 서재필의 추방이 확정되자,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신문사의 인수 문제가 대두하였다.
결국 윤치호에게 인계되어 속간하게 되었다. 그 뒤의 신문논조는 더욱 비판적이었으며 독립협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제3기는 1898년 5월 12일부터 1898년 12월 30일까지로, 윤치호가 주필이 된 이후부터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명실공히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자주민권자강운동(自主民權自强運動)을 지원하고 독립협회의 주장을 대변하면서 민중을 지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898년 7월 1일부터는 격일간지에서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제4기는 1899년 1월 1일부터 1899년 12월 4일까지로,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부터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은 이 신문의 주필이며 독립협회 회장인 윤치호가 독립협회 해산 후 덕원부사(德源府使) 겸 원산감리(元山監理)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떠난 시기이다.
주필은 처음에는 아펜젤러(Appengeller, H.G.)가 맡다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엠벌리(Emberly, H.)가 담당하였다. 이 시기의 신문 논조는 종래의 원칙을 고수했으나 내용과 표현 방식은 온건해졌다. 정부 시책에 대한 비판보다는 국민의 교육과 계몽에 주력하는 편이었다.
 
〔내용과 역할〕
 
이 신문은 근대민족주의 사상, 민주주의 사상, 자주적 근대화 사상을 강조해 국민들을 교육, 계몽한 것에 그 특색이 있었다. 사설에 해당하는 논설에 나타나는 내용을 목표로서의 가치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로 나누어 빈도수를 계산하면 다음 [표〕와 같다.
[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신문이 강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주독립과 애국심 그리고 국가 발전이었다. 당시의 정치체제는 군주국이었으므로 이것을 ‘충군애국’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충군은 곧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미한다. 이 신문에서 가장 강조한 것은 나라의 독립이다.
독립을 지키고 강화하기 위해서 국민 개개인의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둘째,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개화를 빨리 하려면 교육이 가장 급선무라고 보고 신교육의 긴급성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셋째, 국민들에게 처음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쳐주고 국민 참정과 의회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넷째, 공중도덕의 앙양, 국민적 단결, 중상모략의 폐풍 시정, 사회에 기여하는 생활 태도의 배양 등 사회 관습의 개혁을 강조하였다. 다섯째, 나라의 힘이 산업의 근대적 개발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여섯째, 관료들의 횡포와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준법과 공정한 사회적 풍토 조성을 강조하였다.
일곱째, 당시 우리 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위급함을 알려 국민적 각성이 없으면 자주독립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끊임없이 경각심을 높여주면서 외세를 경계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신문이 이러한 주장은 당시 한국인의 사상과 의식의 변화, 한국사회의 발전에 커다란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중요한 점을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① 논설과 보도를 통해 근대 사회의 확립에 필요한 지식과 사상을 공급해 개명진보를 위한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변혁에 공헌하였다. ② 당시 한국에 대한 열강의 침략정책을 낱낱이 폭로 비판하고, 나라의 독립과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데 진력하였다.
친러수구파와 결합해 이권 침탈과 내정 간섭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던 제정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격렬한 논조로 비판하였다. 또 개항장에서의 외국인의 국권 침해나 한국인의 권익 침해 사실을 고발하였다.
③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관리는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에 불과하다고 하여 국민을 군주보다도 상위에 둠으로써 국민주권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대대적으로 보급하였다. 또 국민이 권리를 갖고 그 권리를 행사할 때 나라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해 국민의 참정과 의회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국민주권 사상과 민주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민권을 신장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④ 국문 전용·국문 띄어쓰기·쉬운 국어쓰기 등을 실행해 민족언어와 문자[한글]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는 서재필의 민주주의적 결단과 주시경의 민족주의 사상이 결합해 이루어진 획기적인 것으로, 민중에 의한 민족문화 창달에 큰 공헌을 하였다.
⑤ 당시 만연해 있던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탐관오리들의 횡포를 고발, 규탄해 백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⑥ 독립협회의 창립을 위한 일종의 사상적 준비작업을 했고 창립 후에는 기관지의 역할을 하여 독립협회의 사상 형성과 자주민권자강운동의 전개에 공헌하였다.
⑦ 1898년에 있었던 만민공동회운동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공헌하였다. 민중의 자발적 참여와 만민공동회의 독자적 발전은 이 신문이 창간 이후 전개해 온 계몽활동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는 ≪독립신문≫이 순국문으로 편집되어 민권 신장을 위한 논설에 치중해 민중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평민층에 많은 독자층을 이룬 데도 기인한 것이었다.
⑧ 역사상 최초의 민간지로 창간되어 국민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해 정치활동을 전개하는 방법을 확립하였으며, 한말 신문과 출판문화의 발흥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⑨ 한국인에게 세계 사정을 알게 하고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게 하였으며,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해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⑩ 영문판을 발행해 한국의 사정을 정확하게 외국에 알릴 수 있었다.
당시 국제 열강들은 일시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서로 견제하면서 한국을 속국화할 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 나라 사정을 각각 자기들의 입장에서 왜곡해 세계에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불리한 보도가 많았다. 영문판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의 사정과 한국인의 의사를 공정하게 세계에 알려 한국의 독립과 권익을 주장하고 옹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운 영〕
 
≪독립신문≫의 책임자는 서재필이었고 부책임자는 주시경이었으며, 그 아래 상당수의 탐방원(探訪員)이라고 부르는 기자를 두었다. 영문판의 편집에는 서재필의 조수로 헐버트(Hulbert,H.B.)의 도움을 받았다.
창간 당시에는 서울 정동의 본사 이외에 인천·원산·부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두었다. 그 뒤 신문이 발전하면서 지방 지국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어 갔다. 국문판 발행 부수는 서재필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에는 300부씩 인쇄하던 것이 곧 500부가 되고 나중에는 3,000부씩 발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 의거해 계산해 보면, 1898년 1월 독립협회 회원이 2,000명이었을 때 약 1,500부를 발행했으므로 1898년 11월 독립협회 회원이 4,173명으로 늘었을 때는 3,000부로 급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추정된다. 영문판은 의외로 구독자가 늘어 미국·영국·러시아·중국 등에 상당한 부수가 발송되었다.
영문판의 발행 부수는 1898년 1월 현재 약 200부였다. 물론 개략적인 숫자이지만 당시의 조건으로서는 많은 발행 부수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발행 부수의 증가 추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구독 방식은 오늘날처럼 한 사람이 1부를 읽고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하는 형태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독립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는 발행 부수의 수십배 수백배나 되었다. 1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혀○다는 기록을 고려하면 실제 독자층은 발행 부수보다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판매는 정기 구독자에게는 배달제도와 우송제도를 병행하였다.
또한 서울에서는 가판제도(街販制度)도 실시하였다. 이 경우에는 신문판매자에게 20%의 이윤을 얻도록 배정하였다. 창간 당시 1부의 생산비는 1전 6리였는데 신문 대금[판매가격]은 1부에 1전이었으로 1부당 6리의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영리가 목적이 아니라 국민 계몽이 목적이었으므로 적자를 감수하고 발행하였다.
신문사는 적자 운영을 극복하기 위해 1897년 1월 1일부터 신문 대금을 인상하였다. 국문판 1부에 2전, 월 25전, 연 2원 60전으로 하였다. 영문판은 1부에 5전, 월 75전, 연 6원으로 하였다. 또한 신문사 인쇄시설로 ≪그리스도신문≫을 인쇄해주고 시민의 명함을 인쇄해 수입을 보충하였다.
그러나 신문사 수입의 대종을 이루었던 국문판 신문 대금이 예정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 적자는 서재필이 중추원 고문의 봉급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신문사의 주필 월봉 150원을 한번도 받지 않고 무보수로 근무함으로써 충당되었다.
 
〔폐 간〕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친러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게 되자 독립신문도 폐간 위기에 봉착하였다. 정부는 윤치호를 외직으로 방출하고 신문사의 매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미국공사 알렌(Allen, H.N.)은 고종 및 수구파정부와 긴밀히 결탁해 ≪독립신문≫의 자진 정간을 강력히 요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1899년 1월에 〈신문조례〉를 제정해 ≪독립신문≫ 등 각종 신문들의 혁신적 논조를 탄압하려고 하였다. 윤치호가 서울을 떠나게 되자 신문사는 아펜젤러를 주필로 추대해 신문을 속간하기로 결정하였다. 아펜젤러가 주필로 취임한 1899년 1월 이후 정부 비판의 논조는 현저히 완화되고 주로 온건한 계몽적 논설을 게재하였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독자들과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회원들을 실망시켜 ≪독립신문≫의 사회적 위신을 저하시켰다. 또 ≪독립신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을 완화시키지도 못하였다. 정부는 관료의 부정부패에 대한 정당한 보도에 대해서도 독립신문사를 수색하고 기자를 체포하는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문사를 인수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공작을 시도하였다. 신문사는 1899년 6월 1일부터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를 사장 겸 주필로 임명하고 아펜젤러가 동업자로 후퇴해 퇴세를 만회하려 하였다. 엠벌리는 신문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국문판의 크기를 확대하고 영문판은 주 2회로 축소 간행하였다.
그러나 국문판의 논조는 맥이 빠지고 영문판은 오자 투성이였고, 결국 2주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정부는 ≪독립신문≫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1899년 7월 18일 독립신문사의 사옥 반환을 요구하였다. 신문사는 당시 심한 적자 운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의 이러한 요구는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신문사는 정부의 사옥반환 요구를 몇 차례 연기시켰지만 무제한 미룰 수는 없었다. 정부가 노린 것은 물론 사옥 반환 자체가 아니라 이를 구실로 한 신문사의 매수였다.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서재필은 더 이상 신문사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판매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의 외부대신이 1899년 11월 27일자로 신문사 사옥의 반환을 재촉하였다. 미국공사 알렌은 정부와 서재필 사이에서 독립신문사 매수에 대한 중개를 알선하였다. 그 결과 서재필의 동의를 얻어 알렌은 대한제국 외부대신에게 12월 4일자의 회답 공한에서 신문사의 사옥과 함께 인쇄시설 일체를 1899년 12월 24일자로 일금 4,000원으로 정부에 양도하겠다고 회답하였다.
≪독립신문≫은 1899년 12월 4일자[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내었다. 정부는 독립신문사를 매수할 당시에는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고용해 국문판과 영문판을 일간으로 속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정작 신문사를 매수한 다음에는 ≪독립신문≫을 영구히 폐간시켜버렸다.
 
≪참고문헌≫ 高宗時代 커뮤니케이션 形態의 考察-특히 독립신문과 協會를 중심으로-(崔埈, 史學硏究 3, 1959), 독립신문 판권과 한·미교섭(崔埈, 중앙대학교논문집 13, 1969), 韓國言論史硏究(鄭晉錫, 一潮閣, 1983), 開化期 民族紙의 社會思想(金珉煥, 나남, 1988), 大韓帝國期 新聞硏究(崔起榮, 一潮閣, 1991), 독립신문의 創刊과 그 啓蒙的 役割(愼鏞廈, 韓國史論 2, 1975), 徐載弼의 독립신문 刊行에 대해(李光麟, 震檀學報 39, 1975), 獨立協會指導勢力의 象徵的 意識構造(朴永信, 東方學志 20, 1978), 독립신문에 표시된 價値觀念(李萬甲, 韓薄劤博士停年紀念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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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