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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 가사(歌辭)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 기행가사 # 김인겸
【학습】
(2019.07.18. 13:22) 
◈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조선 영조 때의 문인 김인겸의 작품으로, 영조 39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작가가,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일본의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의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영조 39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7월 8일 경희궁에 들어가 복명(復命)할 때까지의 약 11개월에 걸친 긴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으로, 총 4책 8,000여 구나 되는 대작이다.
목   차
[숨기기]
일생을살아감에 성품이 어설퍼서 입신 출세에는 뜻이 없네.
진사 정도의청렴하다는 명망으로 만족하는데 높은 벼슬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과거공부에 필요한 도구를 모두 없애 버리고 자연을 찾아 놀러 다니는 옷차림으로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다 본 후에,
음풍농월하며금강 유역에서 은거하고 지냈는데,
서재에서 나와 세상 소식을 들으니
일본의 통치자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고 우리 나라에 친선 사절단을청한다네.
 
이때가 어느 때인고 하면 계미년 8월 3일이라.
경복궁에서 임금님께하직하고 남대문으로 내달아서
관우의 사당 앞을 얼른 지나 전생서에다다르니,
사신 일행을 전송하려고 만조 백관이 다 모였네.
곳곳마다장막이 둘러쳐 있고 집집마다 안장을 얹은 말이 대기하고 있도다.
전후좌우로 모여들어 인산인해가 되었으니
정 있는 친구들은 손 잡고장도를 걱정하고,
철 모르는 소년들은 한없이 부러워하네.
 
(중략)
 
석양이거의 되니 하나하나 이별하고
출발 신호에 따라 차례로 떠나갈 때에,
절과 부월 앞을 인도하는 군관이 국서를 인도하고
비단으로만든 양산과 순시 영기가 사신을 중심으로 모여 섰다.
나 역시 뒤를따라 역마에 올라 타니,
때때옷을 입은 지로 나장이 깃을 꽂고 앞에서고
마두서자가 부축하고 쌍두마를 잡았구나.
청파역졸이 큰소리로 외치는 권마성은 무슨 일인가?
아무리 말려도 정해진 의식이라고굳이 하네.
수염이 허옇게 센 늙은 선비가 갑자기 사신 노릇함이
우습고 괴이하니 남 보기에 부끄럽다.
 
거센바람에 돛을 달고 여섯 척의 배가 함께 떠날 때,
악기 연주하는소리가 산과 바다를 진동하니
물 속의 고기들이 마땅히 놀람직하도다.
부산항을 얼른 떠나 오륙도 섬을 뒤로하고
고국을 돌아보니밤빛이 아득하여
아무 것도 아니 보이고, 바닷가에 있는 군영 각항구의
불빛 두어 점이 구름 밖에서 보일 듯 말 듯하다.
 
선실에누워서 내 신세를 생각하니
가뜩이나 마음이 어지러운데 큰 바람이일어나서,
태산 같은 성난 물결이 천지에 자욱하니,
만 석을실을 만한 큰 배가 마치 나뭇잎이 나부끼듯
하늘에 올랐다가 땅밑으로 떨어지니,
열두 발이나 되는 쌍돗대는 종이로 만든 옷처럼(나뭇가지처럼) 굽어있고
쉰 두 폭으로 엮어 만든 돛은 반달처럼 배가 불렀네.
큰우렛소리와 잦은 벼락은 등 뒤에서 떨어지는 것 같고,
성난 고래와용이 물 속에서 희롱하는 듯하네.
선실의 요강과 타구가 자빠지고엎어지고
상하 좌우에 있는 선실의 널빤지는 저마다 소리를 내는구나.
 
이윽고해가 돋거늘 굉장한 구경을 하여 보세.
일어나 선실 문을 열고 문설주를잡고 서서,
사면을 바라보니 아아! 굉장하구나,
인생 천지간에이런 구경이 또 있을까?
넓고 넓은 우주 속에 다만 큰 물결뿐이로세.
등 뒤로 돌아보니 동래의 산이 눈썹만큼이나 작게 보이고
동남쪽을돌아보니 바다가 끝이 없네.
위 아래 푸른 빛이 하늘 밖에 닿아있다.
슬프다. 우리의 가는 길이 어디란 말인가?
함께 떠난다섯 척의 배는 간 곳을 모르겠도다.
사방을 두루 살펴보니이따금 물결 속에
부채만한 작은 돛이 들락날락하는구나.
 
배안을 돌아보니 저마다 배멀미를 하여
똥물을 다 토하고 까무라쳐서죽게 앓네.
다행하도다. 종사상은 태연히 앉았구나.
선실에도로 들어와 눈 감고 누웠더니
대마도가 가깝다고 사공이 말하거늘
다시 일어나 나와 보니 십 리는 남았구나.
왜선 십여 척이 배를끌려고 마중을 나왔네.
그제서야 돛을 내리고 뱃머리에 줄을 매어
왜선에 줄을 던지니 왜놈이 그것을 받아
제 배에 매어 놓고일시에 노를 저으매
배가 편안하고 조용하게 움직여 좌수포로 들어가니
시간을 오후 3-5 쯤 되었고 짐을 실은 배는 먼저 와 있다.
 
포구로들어가며 좌우를 둘러보니,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의 모습이 몹시도아름답다.
소나무, 삼나무, 대나무, 잣나무, 귤유 등감 등이 모두다 등청일세.
왜인 종자 여섯 놈이 금도졍에 앉아 있구나.
인가가드믈어서 여기 세집 저기 네 집.
합하여 헤아리면 오십 호가 넘지않는다.
집 모습이 몹시 높아서 노적더미 같구나.
 
(중략)
 
구경하는왜인들이 산에 앉아 굽어본다.
그 중의 남자들은 머리를 깎았으되
뒤통수만 조금 남겨 고추상투를 하였고,
발벗고 바지 벗고 칼하나씩 차고 있으며,
여자들의 치장은 머리를 깎지 않고
밀기름을듬뿍 발라 뒤로 잡아매어
족두리 모양처럼 둥글게 감았고,
그끝은 둘로 틀어 비녀를 질렀으며
노소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얼레빗을꽂았구나.
의복을 보아하니 무 없는 두루마기
한 동으로 된옷단과 막은 소매가 남녀 구별 없이 한가지요,
넓고 크게 접은 띠를느슨하게 둘러 띠고
늘 쓰는 모든 물건은 가슴 속에 다 품었다.
남편이 있는 여자들은 이를 검게 칠하고
뒤로 띠를 매었고, 과부, 처녀 , 계집아이는
앞으로 띠를 매고 이를 칠하지 않았구나.
 
점심먹고 길 떠나서 이십 리를 겨우 가서
날이 저물고 큰 비가 내리니길이 끔찍하게 질어서
미끄러워 자주 쉬어야 하기에,
가마 멘다섯 놈이 서로 돌아가며 교대하되
갈 길이 전혀 없어서 둔덕에가마를 놓고
한참 동안 머뭇거리면서 갈 뜻이 없는지라.
사방을둘러보니 천지가 어둑어둑하고
일행들은 간 곳이 없고 등불은 꺼졌으니,
지척을 분간할 수 없고, 넓고 넓은 들 가운데서
말이 통하지않는 왜놈들만 의지하고 앉았으니,
오늘 밤의 이 상황은 몹시 외롭고위태하다.
가마꾼이 달아나면 낭패가 오죽할까.
그놈들의 옷을잡아 흔들어 뜻을 보이고,
가마 속에 있던 음식을 갖가지로 내어주니,
저희들끼리 지껄이며 먹은 후에 그제서야 가마를 메고
조금씩나아가는데 곳곳에 가서 이러하니
만일 음식이 없었더라면 필연코도주했을 것이다.
삼경쯤이나 되어서야 겨우 대원성에 들어가니
머리가 아프고 구토하여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16일에비옷을 입고 강호(동경)로 들어갈 때에
왼편은 마을이요, 오른편은바다(태평양)로다.
산을 피하고 바다를 향해 있는 들판이 옥야 천리로생겼는데
높은 누각과 집들은 사치스럽고 사람들이 번성하다.
성곽의높고 장한 모습과 다리와 배의 대단한 모습이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이몹시 장하고 숫자가 많으니
어설픈 붓끝으로는 이루 다 적지 못하겠도다.
삼십 리 오는 길이 빈틈없이 인파로 이어져 있으니,
대체로헤아려 보면 백만이 여럿이로구나.
여자들의 모습이 아름답기가명고옥(나고야)과 한가지다.
 
실상사로들어가니 여기도 무장주일세,
처음에 덕천 가강(도쿠카와 이에야스)이무장주의 태수로서,
풍신 수길이 죽은 후에 그 가계를 없애 버리고,
이 땅(강호)에 도읍을 정하여 강하고 풍요로우며,
일을 계획함이신중 은밀하며 법령도 엄격하고
생각하는 것도 깊어서 왜국을 통일하니,
아무튼 제 무리에서는 영웅이라고 하겠도다.
덕천 가강이 죽은후에 자손이 이어져서
이 때까지 누려 오니 복력이 기특하다.
17일에는비가 개지 않아서 실상사에서 묵었다.
 
(하략)
 

 
 

1. 요점 정리

• 작자 : 김인겸
• 연대 : 조선 영조 40년(1764)
• 형식 : 4(3)·4조, 4음보, 총 8000여구
• 갈래 : 기행가사, 장편가사
• 성격 : 사실적, 직서적, 서술적
영조때 일본에 사신으로 갈 때 작자가 그의 수행원으로 따라가그 이듬해 돌아올 때까지 약 11개월에 걸친 여행 중의 생활, 일본과의 외교적 편모, 일본의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하였다.
• 화자의 태도 : 임란후 대왜 감정이 좋지 않아 '일본인'을 왜놈이라 칭하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일본을 오랑캐로 보고 우수한 조선의 문화를 전수하여 교화시키고자 하는 화자의 문화적 자부심과 우월감이 나타나 있음.
• 구성 : 추보식 구성
제 1권 212구 : 일본에서 친선 사절을 청하여, 여러 수속 끝에 8월 3일 서울을 출발하여, 용인, 충주, 문경, 예천, 안동, 영천, 경주, 울산, 동래를 거쳐 8월 20일 부산에 이름
제 2권 5845구 : 10월 6일, 부산에서 승선하여 발선하는 장면에서부터 대마도, 일기도, 축전주, 남도를 거쳐 적간관에도착하여 12월 30일까지 머묾.
제 3권 368구 : 정월 초하루 적간관의 명절 이야기로부터오사카, 교토, 오다와라, 시나카와를 거쳐 에도에 들어가 2월 27일 국서 전달 사행(使行)의 임무를 마치고, 3월 6일까지 머묾..
제 4권 1818구 : 3월 7일 관백의 답서 받고, 3월 11일 귀로에 올라, 6월 22일 부산에 귀환, 6월 25일 부산 출발 7월 8일 서울에 와서 영조께 복명(다녀온 결과를 보고)함.
• 제재 : 일본의 풍속, 제도, 인정 등의 견문
• 주제 : 일본의 문물ㆍ제도ㆍ인물ㆍ풍속 등 일본 여행에서의 견문과 여정
• 표현 : 대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묘사가 이루어지고 있고, 대구, 직유, 과장 등 다양한 표현법 사용했으며, 정확한 날짜, 날씨, 자연 환경, 사건, 감상 등을 사실적으로 기록했고, 작가의 예리한 비판 정신과 재치, 해학이 담겨 있음.
• 의의 : 총 4권, 4책으로 8천여 구나 되는 현존 최장편 기행 가사이며, 조선말 외국 여행 가사로서 홍순학의 '연행가'와함께 쌍벽을 이루는 기행 가사의 백미이다. 특히 한글 장편 기행 가사로되었다는데서작자의 평민 정신을 엿볼 수 있으며, 정확한 노정과 일시를 적고, 날씨, 자연 환경, 실지 답사에서얻은 경험과 함께 작자의 공정한 비판, 흐믓한 해학 등을 맛볼 수 있어기행문으로서 훌륭한작품이다.
• 출전 : 가람 문고본
 
 

2. 내용 연구

 
....
 
이하 수업 자료임
 
이십칠 일[1764년 음력 1월 27일] 사상네가[사절단 일행] 관소[관리들이나 외교관을 대접하기 위한 숙소]]에 잠간 내려
 
숙공[익은 음식] 받고 잠간 쉬어
 
저무도록 행선하여 청포로 올라오니[청포까지는 바다를 통해 배로 이동하는 여정임],
 
여염[일반 백성들의 살림집]도 즐비하여
 
물가에 성을 쌓고 경개[경치]가 기이하다. - 일본 청포에 도착함
 
물속에 수기[물을 끌어오는 기계] 높아 강물을 자아다가[끌어들여]
 
홈으로 인수하여[물을 끌어] 성안으로 들어가니
 
제작이 기묘하여 본받음직 하고나[수용의 자세 / 실용적인 이용후생의 자세] - 편리하게 물을 운반하는 수기의 기묘함
 
그 수기 자세히 보니 물레를 만들어서
 
좌우에 박은 살이 각각 스물 여덟이오[작가의 정확하고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임]
 
살마다 끝에다가 널 하나씩 가로 매어 물속에 세웠으니
 
강물이 널을 밀면 물레가 절로 도니[강물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수기]
 
살 끝에 작은 통을 노으로[노끈으로] 매었으니
 
그 통이 물을 떠서 돌아갈 제 올라가면
 
통 아래 말뚝 막아 공중에 나무를 매어
 
말뚝이 걸리면 그 물이 쏟아져서 홈 속으로 드는구나[수기로부터 홈으로 물이 운반되는 원리] - 수기의 구조와 작동 원리
 
물레가 빙빙 도니 빈 통이 내려와서
 
또 떠서 순환하여 주야로 불식하니[쉬지 않으니]
 
인력을 아니 들였어도[자동]
 
성가퀴 높은 위에 물리 절로 넘어가서[그 수기 자세히 보니 ~ 절로 넘어 가서 : 수기의 작동 과정]
 
온 성안 거민[성안 백성]들이 이 물을 받아 먹어 부족들 아니하니,
 
진실로 기특하고 묘함도 묘할씨고[감탄] - 수기의 가치와 효용성
 
지명은 하내주요 사십 리 와 있구나. - 하내주에 도착함
 
 
이십팔 일 발행할 새[28일부터는 육로를 이용하여 이동함] 수백 필 금안준마[금으로 꾸민 안장을 얹은 좋은 말 / 화려한 행장]
 
중하관을 다 태우니 기구도 장할시고[사신들을 수행하는 많은 중하급 관원들까지 모두 태운 장비의 성대함]
 
각 방 노자[사내종]들도 호사[호화롭게 사치함]가 참람하다[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치다]. - 사신단 이동에 사용할 기구들의 성대함
 
좌우에 쌍견마[말 한 필에 고삐 둘을 하여 양쪽으로 나누어 두 사람의 마부가 이끄는 말]요, 한 놈은 우산 받고
 
두 놈은 부축하고 담배 기구 한 놈 들고[담배가 별도의 담당자가 필요할 정도로 중요한 기호 식품이자 접대 품목이었음을 알 수 있음]
 
한 놈은 등불 들고 한 놈은 그릇 메어
 
한 사람의 거느린 수 여덟씩 들었구나
 
나하고 삼 문사는 가마 타고 먼저 가니
 
금안을 지운 재고[동작이 빠르고] 큰 말 거듭[두 마리] 말로 앞에 섰다. - 사신단 호위 행렬의 인원 배치
 
여염도 왕왕[자주] 있고 흔한 손 죽전[대밭 / 온화한 기후에서 자라남]일다.
 
토지가 고유하여[땅이 비옥하여] 전답이 마이[아주] 좋이,[비옥한 토지에 대한 화자의 감탄]
 
이십리 실상사로 가 삼사상[사신 3인] 조복[예복][입을][때],
 
나는 내리잖고 왜성[교토]으로 바로 가니
 
사신단들은 한양 - 용인 - 충주 - 문경 - 예천 - 안동 - 영천 - 경주 - 울산 - 동래 - 부산 - 대마도 - 일기도 - 축전주 - 남도 - 적간관 - 오사카 - 교토 - 오다와라 - 시니키와 - 에도(지금의 도쿄)를 여행
 
인민이 부려하기[부유하고 화려하기]대판[오사카]만은 못하여도
 
성에서 동에 가기 삼십 리라 하는구나.[생각보다 큰 왜성의 규모에 놀라고 있다.]
 
관사[사신이나 벼슬아치를 대접하기 위한 숙소]는 봉국사요 오층 문루 위에
 
여남은[열이 조금 넘은] 구리 기둥 운소[구름 낀 하늘]에 닿았구나.[구리 기둥의 위용]
 
수석도 기절하고[아주 신기하고 기이하고] 죽수[대나무]도 유취[그윽한 정취] 있네.[일본 경치에 대한 감상]
 
왜황의 사는 데라 사치가 측량없다[일본 왕이 사는 교토의 화려함과 지나친 사치에 대한 강직한 성품의 유학자로서 비판적인 시각이 깔려 있음] - 객관인 봉국사의 경치와 사치스러움
 
산형이[산세] 웅장하고 수세도 환포하여[사방으로 둘러싸여]
 
옥야천리[넓고 기름진 평야] 생겼으니 아깝고 애달플손[화자의 태도가 드러남]
 
이리 좋은 천부[하늘이 주었다는 뜻 / 타고날 때부터지님] 금탕[방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성] 왜놈[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직설적으로 표현]의 기물 되어
 
칭제 칭황하고[황제를 자칭하며] 전자전손[자손에게 전수 / 대대손손]하니
 
개돗[개돼지] 같은 비린 유[것 = 왜놈, 일본인]들 몰속[모두 다] 소탕하고
 
사천 리 육십 주[일본 국토와 행정 구역]를 조선 땅을 만들어서
 
왕화에 목욕 감겨 예의 국민 만들고자[임금의 교화에 목욕을 감겨 예의있는 국민을 만들고 싶음 / 화자의 소망] - 천혜의 자연과 기름진 땅에 대한 감상과 일본에 대한 적개심
 
(하략)
 
 
 

3. 이해와 감상

조선 영조 때의 문인 김인겸의 작품으로, 영조 39년 조엄이 통신사로 일본으로 갈 때, 수행원으로 따라갔던 작가가,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의 여정과 일본의 문물 제도, 인물, 풍속 등의견문을 기록한 기행 가사이다. 영조 39년 8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7월 8일 경희궁에 들어가 복명(復命)할 때까지의 약 11개월에 걸친 긴여정을 빠짐없이 기록한 것으로, 총 4책 8,000여 구나 되는 대작이다.
 
정확한 노정(路程)과 일시(日時)를 적고, 날씨, 자연 환경, 일어난 사건, 작자의 느낌 등을 과장 없이 그대로 묘사했을뿐 아니라 도처에 날카로운 비판과 유머가 곁들어져 있어 기행 문학의묘미를 십분 살려 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홍순학의 <연행가>와쌍벽을 이루는 장편 기행 가사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진다.
 
 

4. 이해와 감상1

조선 후기에김인겸(金仁謙)이지은 기행가사. 국문본. 총 7,158행 3,500여구에 달하는 장편기행가사이다. 이 작품은 1763년(영조 39) 8월 일본 통신사 조엄(趙湄),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 제술관(製述官) 남옥(南玉) 등으로 구성된 이른바계미통신사(癸未通信使)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수행한 작자가 이듬해 7월 8일 복명할 때까지 11개월 동안 견문한 바를 기록한 것이다.
 
군관 17명, 역관 12명, 의원 3명을 비롯, 100여명의 행원(行員)과 400명에 달하는 역원들을합하여 일행 500명이 서울을 떠난 지 두달 만인 10월 6일 부산항에서승선하여 대마도와 대판성(大阪城)을 거쳐 에도(江戶)에 도착한 것이다음해 2월 16일이다.
 
이역만리의 긴노정에 따라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의 풍속, 외교임무의 수행과정등을 소상히 기록하였고, 강직한 선비의 기개와 비판의식이 넘쳐 있을뿐 아니라, 기행문의 요체가 잘 갖추어져 있어 홍순학(洪淳學)의 〈연행가〉와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작자 김인겸은 1753년(영조 2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통신사의 서기로 발탁되기까지향리 공주에 칩거한 강직 청렴한 선비로서, 문장에 특출하였다. 이 작품에서는행로에서 받은 융숭한 대접과 풍물에 대한 이야기며, 수천수에 달하는시를 지어 왜인에게 준 문인외교의 편모를 알 수 있다.
 
특히 “당당한천승국의 예물예단 가져와서 개돝 같은 취류에 사배(四拜)하기 어떠할꼬.”라는구절에서는 개돝 같은 왜놈에게 예배하기 싫어 상사(上使)들의 강권도듣지 않고 국서 봉정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작자의 대일감정을 엿볼 수있다. 왜녀의 음란한 풍속과 일본의 경관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도 특유의통찰력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자의강직 청렴한 정신과 여유와 해학이 넘치는 성격이 반영되어 있으면서지명·인명·일시·거리와 역사적인 사실에 객관성을잃지 않은 고전기행문의 대표작이다. 국내의 노정은 주로 삽화와 지방의특색을 서술하고 감상을 주로 하고 있으나, 일본에 대한 묘사는 객관적인관찰과 주관적 비판으로 일관하면서도 주체적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국문학자료로서는물론, 외교사절단의 규모와 일본의 풍속 및 외교의 방법 등, 한일외교사의측면에서도 귀중한 자료이다. 이 작품은 가사체로 된 기행문이라는 특성때문에 서정적 가사라기보다 기행수필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가람본이 영인, 보급되어 있고, 따로 이가원(李家源)본이있다.
 
≪참고문헌≫ 海行摠載, 韓國古典文學의 理解(張德順, 一志社, 1973), 日東壯遊歌(沈載完, 語文學 17·19·20, 196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심화 자료

김인겸 金仁謙 (1707~1772)
 
1707(숙종 33)∼1772(영조 48). 조선 후기의 문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안(士安), 호는 퇴석(退石). 상헌(尙憲)의 현손,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郎) 창복(昌復), 어머니는인동장씨(仁同張氏) 서주(瑞周)의 딸이다.
 
문벌이 혁혁(赫赫)한 집안에 태어났지만그의 할아버지인 수능(壽能)은 서출이라 과거에 급제하고도 현감에 그쳤다. 14세 때에 아버지를 사별하고, 가난에 시달려 학문에 전념하지 못하다가 47세 때인 1753년(영조 29)에야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57세 때인 1763년에는 통신사행(通信使行)의종사관인 김상익(金相翊)의 서기(書記)로 뽑혀 통신사 조엄(趙湄)과함께 일본에 다녀왔다. 1764년 일본에 다녀온 기행사실을 가사형식으로 〈일동장유가〉를 지었다. 그뒤 지평현감(砥平縣監)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저술로는 역시 일본기행을 한문으로 지은 ≪동사록 東笑錄≫이 있다.
 
≪참고문헌≫ 海笑日記, 韓國紀行文學硏究(崔康賢, 一志社, 1982), 日東壯遊歌의 作者 및 背景硏究(金南秀, 建國大學校碩士學位論文, 1975).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통신사 (朝鮮通信使)
 
1404년(태종 4) 조선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성립되자, 조선국왕과 막부장군은 각기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현안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절을 각각 파견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교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보빙사(報聘使)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통신관(通信官) ·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에 통신사의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13년(태종 13) 박분(朴賁)을 정사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다. 그뒤 통신사의 파견이 실제로이루어진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京都]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의사절단으로 최초의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刷還),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축하가 주임무였다. 그러나 그 역사적인 의의는 조 ·일 양국간만이아니라, 중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삼국의 평화공존을 위한 국제관계에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데 있다.
 
파견절차는 일본에서 새로운 막부장군의 승습이결정되면, 대마도주는 막부의 명령을 받아 통신사청래차왜(通信使請來差倭)를조선에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중앙관리 3인 이하로정사 ·부사 ·서장관을 임명하고 300~500명으로 구성되는사절단을 편성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까지는 육로로 간뒤, 부산에서부터는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해로를 이용하여 대마도를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일본 각번의 향응을 받으며 오사카[大阪]의요도우라[淀浦]에 상륙하였다. 그뒤 육로로 교토로 갔다. 조선 전기에는이곳에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교토가 종점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장군이도쿄[東京]에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가 도쿄가 되었다. 일행이 통과하는객사에서는 한시문과 학술의 필담창화라고 하는 문화상의 교류가 성대하였다. 특히 통신사에 대한 화려한 접대는 일본의 재정을 압박하는 하나의 원인이되었으며, 그 때문에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막부장군에게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한 통신사는대개 6개월~1년이 소요되었다. 그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 ·시문등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것이 화려한 행렬도를 그린 병풍 ·회권 ·판화 등의 형태로 전해진다. 또 그들은 귀국 후 일본에서 겪은일들을 여러 형태로 남겼는데, 이것이 《해행총재(海行總載)》라는 견문록으로엮어져서 당시 두 나라 간의 외교적인 역할 및 문화교류의 실상을 보여준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
 
작품의 배경이 되는 통신 활동
 
기간 : 763년(영조 39) 8월 3일부터 이듬해 7월 8일에돌아오기까지 11개월(일본에 머물렀던 기간은 11개월이고, 나머지는왕복 기간이다.)
 
여행 목적 : 일본 관백 원가중이 퇴휴하고 그 아들인원가치가 관백의 자리를 계승하자 일본 측에서 구호를 또는 수교하자는요청이 왔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여 영조 39년 게미 8월에 통신사를차출하였다. 일본의 관백인 토쿠가와 이에시게가 죽자 그의 아들 토쿠가와이에하루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것임.
 
여행한 곳 : 대마도 - 오오사카 - 에도(도쿄의 옛이름)
 
기타 : 일종의 문화사절단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우리나라는 문화국으로 일본의 야만적이고, 비문화적인 면을 멸시하는경향이 농후하여 통신사들은 가는 곳마다 김인겸이 귀국하여 영조에복명한 것을 보면, 왜인에게 지어준 것이 몇천 수가 된다고 하였으니, 그 때의 외교는 작시(作詩)외교라고 할 만 것이었다. 고종 13년에는수신사로 이름을 바꾸어 김기수가 갔었고, 다음 해에는 김홍집이 다녀왔다.
1764년 가사(歌辭)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 # 기행가사 # 김인겸
【학습】 가사∙개화가사
• 일진회(一進會)야
•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 유산가 ( 遊山歌 )
【작성】 이완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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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General Libraries 최종 수정일: 2021년 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