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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바람처럼 스쳐간…

▣ 바람처럼 스쳐간…     바람처럼의 지식창고 2018.06.12. 23:56 (2018.06.12. 23:56)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이 글은 산악인이자 작가였던 박인식 님이
73년 토왕성 빙폭 등반 중에 사망한 송준호 산악인의 취재 기록으로 오래전에 발표한 글을 퍼온 것입니다.
 
토왕폭 등반을 갈망하던 그 시절 산악인의 열정을
토왕에 생명을 묻은 선배 산악인의 자취를 통해 열린캠프 등산학교 가족과 공감하고자 게시판에 올립니다.
다소 과장한 부분과 일시, 연대를 잘못 기록한 부분은 헤아려 읽기 바랍니다.
 
 
<하얀 빙벽 위에 울던 표범>
박인식 글
 
1 설악은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솜다리 꽃, 박새풀, 둥굴레, 함박꽃, 전나무, 아! 자작나무,
설악골, 용소골, 토막골, 잦은바위골, 골골, 그리고 대청의 바람과 구름 그리고 동해까지…
거기에다 설악 詩를 가지고 있고 또 '설악가'라는 노래까지 가지고 있다.
 
설악의 노래는 슬픈 노래다. 아니, 서럽도록 아름다운 노래다.
'너와 나 다정하게 걷던 계곡길, 저 높은 봉우리에 폭풍우 칠 적에…'
 
그 설악의 가을에 산친구는 죽었다.
죽은 친구를 설악에 묻고 뒤돌아 보며 부르는 노래가 설악가다.
'내 어이 잊으리요 꿈 같던 산행을, 잘 있거라 설악아 내 다시 오리니…'
 
 
2 외설악 초입 노루목에 가면 지금은 관광단지 C 지구의 호텔과 여관들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설악의 맞은편 산자락에 사자(死者)의 마을이 있다.
 
설악을 사랑하다 결국 설악의 품에 안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곳에는
1969년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한 한국산악회의 열 동지를 비롯해 많은 산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인가는 없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산악인 묘지인 셈이다.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인생에서 이름마저 남기지 않은 이름없는 산사람의 조그마한 묘지들이 모인 곳이다.
상석은 고사하고 비석마저 제대로 없는 이 무덤의 주인공들은 거의가 벚꽃처럼 젊은 나이에 산에서 저버렸다.
 
그 중에 엄홍석과 신현주라는 두 남녀의 무덤이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두 사람은 설악에서 등반사고로 함께 죽었다.
송준호는 이 두 사람과 같은 산악회 회원이었고 엄홍석과는 자일 파트너였다. 그는 석과 주의 무덤에 자주 갔다.
 
 
3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은 설악의 주능이다.
이 공룡능에서 흘러내리는 설악골과 잦은바위 사이를 천화대라는 암릉이 헐떡이며 치밀어 오르고 있다.
이 천화대에는 여러 지능이 있다. 그 중에서 설악골에서 왕관봉과 범봉 사이를 올라붙는 성과 같은 암릉 하나가 특히 눈길을 끈다.
 
그 암릉을 송준호는 처음으로 올랐다.
그리고 그 능선에 이름을 붙였다. 엄홍석과 신현주의 이름 끝자를 따 '석주길'이라고.
그는 손수 석주길이라 새겨넣은 동판을 제작해 그 암릉과 천화대가 만난는 곳에 붙였고, 그 길은 석주의 영전에 바쳐졌다.
 
그리하여 석주길이 태어났고, 석주는 그의 마음에 산과 인간이 만든 절대미를 조형했다.
산의 절대적인 추상미에 영혼을 빼앗긴 그는 조형된 석주의 산과 인간의 열정이 탄생시킨 환상에 늘 부담감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더욱 완전한 산행을 석주에게 바치기를 원하며 산으로 갔다.
 
 
4 일제 말기 백령회가 설립되면서 우리나라에 근대 알피니즘이 보급되었다.
하지만 알피니즘의 등정주의나 등로주의의 대상이 될만한 입지조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70년대 후반 들어 해외원정으로 그 출구를 마련하기 전까지 알피니즘의 대상은 일부 짧은 암장에서의 기교적인 등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나라의 알피니스트들에게 군계일학 격의 국내 등반 대상지가 된 곳이 딱 한 군데 남아 있었으니,
바로 설악의 토왕폭 빙벽등반이었다.
 
1970년대 초기의 빙벽장비와 기술로 그것은 바로 불가능이었고 절대였다.
그래서 그것은 한국 알피니스트의 존재 이유가 되기도 했다.
 
70년대 초반까지 히말라야 원정은 정찰대에 지나지 않았고 본대라도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
때문에 국내에 아직 미등인 채 남아 있는 토왕폭의 아성은 더없이 높아만 갔다.
그것은 히말라야 8,000미터급 거봉 원정보다 더 귀한 등반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신화였다.
산선배에서 후배로 이어지며 결정(結晶)된 산행미의 실체였다.
그래서 당시의 산사람은 누구나 '토왕! 토왕폭!'을 되뇌었다.
 
석주의 무덤이 있는 노루목은 토왕폭 맞은편에 자리잡은 산기슭이다.
화채봉에서 발원하여 함지덕, 칠성봉 일대에서 하늘에서 내려 드리운 듯한 얼음기둥이 자라나기 시작하는 겨울철,
노루목 석주의 무덤에 성묘를 하고 뒤돌아 설악을 바라보라. 그 얼음기둥의 머리 부분이 보일 것이다.
 
이 땅의 어떤 말도, 어떤 해석도 거부하는 그 토왕의 아름다움에
그 산사람의 온몸은 그가 평소 즐겨 부르던 '설악가'와 끝없이 암송하던 듀 프라의 '그 어느 날'의 환청에 휩싸일 것이다.
 
그 어느 날 내가 산에서 죽을 때
오랜 산친구 자네에게 부탁하네.
내 피켈을 집어다오.
이 피켈이 치욕 속에 죽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네.
어딘가 아름다운 페이스에 가져가주게.
그리고 페켈만을 위한 작은 케룬을 만들어다오.
그리고 그 위에 나의 피켈을 꽂아주게.
 
동해에서 치솟는 아침 햇살을 받아 토왕의 얼굴이 수정처럼 빛날 때나,
설악이 온통 잿빛으로 가라앉을 무렵의 모습은 차라리 신성을 느끼게 한다.
 
그는 석주에게 재배하고 나서 토왕폭을 보며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그 빛나는 토왕폭 위에 석주의 피켈을 꽂고 그 곳에 작은 케룬을 하나 쌓을 것을.
그리하여 그 토왕폭 초등을 석주에게 바칠 것을 다짐했다.
 
1973년의 새해 첫날밤.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한 송준호는 석주에게 편지를 썼다.
둘이 하나가 되어 이 세상 주소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으로 그 엽서를 보냈다.
받는 사람 '석주 귀하', 주소는 '벽에서 노루목', 보내는 사람 '준'. 그것은 3차원의 바깥 세계로 보내진 편지였다.
그리고 그는 토왕폭에서 결국 석주의 곁으로 갔다. 지금 그는 석주와 함께 노루목에 묻혀 있다.
 
이들 세 사람 앞에 세워진 추모비에는
'시간과 존재의 불협화음으로 공간을 활보하고 있는 악우(岳友)들이여!
철학적 경이로써 모둠된 그대들의 자취는 훗날 이 인자한 산정을 찾는 이들의 교훈일 것이다.
추억을 침묵으로 승화시킨 사람들, 그 대담한 의지로 회생하리라.'라고 새겨져 있다.
 
 
5 송준호, 그는 1947년 9월 20일 서울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외아들이었고 여동생이 둘 있었다. 배제중학교, 광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고2 때 부친이 대우중공업 인천공장 자재부장으로 전근하게되어 인천으로 옮겨 살았다.
65년 광운대학에 입학, 3학년을 마치고 69년 육군에 입대했다가 72년 10월에 제대했다.
 
산과의 인연은 고2 때 맺어졌다.
중학교 시절부터 산을 익힌 나경봉 씨와 62년 6월 백운대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그 맞은편에 우뚝 솟은 인수봉에서 바위하는 클라이머의 모습을 보았다.
힐끗 쳐다본 그 산쟁이의 오름 의지는 그에게 산사람으로서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아!' 하는 낮은 탄성을 송준호의 가슴으로부터 뽑아낸 그 클라이머의 실루엣에서
소년 송준호는 자신이 그 바위를 오르고 있는 내일의 모습을 보았다.
 
그해 여름방학 때 나경봉 씨와 송준호는 도봉산 선인봉으로 가서
박쥐코스를 다른 사람이 오르는 모습을 1주일이나 지켜본 후 그들을 본따 기어이 올라갔다.
그후 고교 졸업까지 둘이서만 그 어깨 너머식의 산행을 계속했다.
 
고3 때 산에서 요델 산악회의 백인섭 씨를 만났다.
백인섭 씨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 산쟁이로, 요델 산악회를 고양이에서 표범으로 만든 사람이다.
백씨는 산악회를 이끌 재목감으로 탐이 나는 송준호에게 요델 산악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팀에 소속되어 구속받고 싶지 않다며 입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백씨는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접근했다.
 
대학 1학년 때인 65년 겨울, 송준호는 선인봉 표범길을 몹시 오르고 싶어했다.
표범길은 백인섭 씨 등의 요델 산악회원에 의해 개척된 후 다시 등반한 사람이 없는 최난코스였다.
요델 산악회원도 아닐 뿐만 아니라 코스도 모르는 그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나경봉 씨와 그는 한 달간이나 계속 관찰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해 첫눈이 왔다.
나경봉 씨 집으로 전화가 왔다. 송준호가 산에 가자는 것이었다.
나경봉 씨는 무심히 배낭을 꾸려 그를 따라 선인봉으로 야영을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 송준호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스타트 지점의 튀어나온 바위에 올라 표범길 일대를 찍어 댔다.
바위에는 약간씩 요철된 곳마다 간밤의 눈이 쌓여 있었다.
 
인화한 사진을 찾은 송준호는 사진의 눈 쌓인 부분을 연결하여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기가 막히게도 백인섭 씨가 개척한 표범길과 일치했다. 제2의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그 제2의 선을 좇아 등반에 성공했다.
 
다음해 봄, 그는 결국 요델 산악회에 입회했다.
그후 그의 산행은 요델의 든든한 뿌리 위에서 꽃피었다.
같이 입회한 나경봉 씨와 엄홍석과 송준호는 의형제를 맺고 여러 등반코스를 개척했다.
1967년 우이암 전면코스, 68년 동계 설악산 표범골을(잦은바위골) 개척등반했다.
그리고 그해7월, 설악산에서 조난사한 의형제 엄홍석과 그의 연인 신현주의 영전에 바치는, 그 설악산 석주길을 냈다.
 
70년11월에는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코스 등을 개척등반했으며
71년 1월에는 설악산 표범골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성공했고,
72년 1월에는 설악산 용아장성을 동계초등했다.
 
 
6 그 짧은 기간 내에 그처럼 많은 초등반을 기록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는 거듭되는 산행이 습관적인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했다.
가령 선인봉 표범길의 언더홀드를 스타트로 붙는가 하면, 바로 언더홀드로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미세한 밸런스를 요구하는 지점은 누구나 경험에 의해 스스로 터득한 방식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그곳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는 말일까?
 
그는 178센티미터의 키에 75킬로그램이라는 좋은 체격에 클라이머로서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한 손으로 턱걸이를 여러 번 할 정도로 완력도 좋았다. 남들이 오르기 급급한 곳에서도 그는 언제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그에게 눈을 주었다. 더 높은, 더 어려운 곳을 볼 수 있는 눈을.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을 오르며 멀리 설악산의 흑범길을, 흑범길을 오르며 천화대를,
천화대를 오르며 석주길을, 석주길을 오르며 천화대에서 뻗어내린 염라길을 보았다.
여름의 용아장성을 오르며 눈 덮힌 용아장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높이, 더 높이 보았다.
표범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을 그는 하늘 높이 걸린 토왕폭으로 연결시키려는 꿈을 키웠다.
 
 
7 공학도 기질을 살려 대부분 암벽장비를 자작해서 사용했다.
60년대 중반만 해도 카라비너는 구경조차 힘들었다.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도 않는 미군용 카라비너 대여섯 개만 있어도 암벽등반 베테랑으로 인정받던 때다.
무슨 자랑거리처럼 생각하여 길거리에서도 차고 다녔다.
 
송준호는 US군용 카라비너의 재질까지 연구하여 카라비너를 제작했다.
개폐스프링은 피아노 선이 사용되었다. 그 스프링이 피아노 선이라니!
그 카라비너가 개폐될 때 튀는 소리는 하나의 소나타가 되어 그의 혼을 온통 뒤흔들었으리라.
 
아버지가 근무하던 부천공장에서 테스트까지 거쳐 완성된 카라비너는 등반시 한 번도 벌어진 적이 없었다.
해머, 하켄, 일회용 스테인리스 아이스 하켄까지 제작했다.
일제 볼트 하켄과 점핑 세트가 국내에 보급된 것은 그보다 이삼 년 후인 67년이다.
 
등산가로서 송준호의 진면목은 빙벽등반에서 한결 돋보인다.
71년 1월 그는 설악산 잦은바위골의 50미터 폭과 100미터 폭 빙벽등반에 나섰다.
 
100미터 폭은 후배 오세진 씨와 둘이서 붙었다.
오전 9시에 등반을 시작했으나 어둡도록 끝내지 못하고 달빛 속에서 등반을 계속했다.
그는 열 개의 아이스 하켄을 사용한 후 정상 10여 미터를 남긴 지점까지 도달하여 톱을 오세진 씨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10여 미터는 경사가 완만하여 등반하기가 매우 수월한 곳이었다.
용아장성 동계등반 때도 이러한 배려를 후배에게 자주 베풀었다.
 
등반을 끝내고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넘어 있었다.
그는 100미터 폭을 완등하는 데 10여 시간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요사이의 빙벽장비와 등반기술로는 납득하기 곤란한 시간이지만,
앞이빨 프론트가 없는 8치 아이젠에다 1미터가 넘는 길고 무거운 피켈 한 자루를 믿고,
바트 혹이나 핀 스크류도 없이 얼음이 온통 갈라지며 떨어져나가는 자작한 아이스 하켄만 가지고
종일 스텝 컷팅을 하며 등반해야 한다면 열 시간은 결코 긴 시간이 아니다.
 
설악산 100미터 폭포의 빙벽을 올랐다고 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고 있었다.
 
그해 요델 산악회의 최용준 씨가 토왕폭 상단에 도전해 하켄 10여 개를 설치하고 슬립했는데 하켄이 모두 빠져버렸다.
그토록 당시 이 빙벽장비들은 부실했다.
그것에 반비례하여 토왕폭의 아성은 드높았고 송준호의 산행의지는 자연적으로 토왕폭을 겨냥하여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 가을 설악산 등반을 마치고 석주에 성묘 갔던 그는 곁에 있던 홍경의 씨에게 토왕폭을 가리키며 '저길 오르겠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노루목 성묘를 마치고는 토왕폭 일대를 다음 겨울에 대비하여 정찰등반을 했다.
 
이듬해 12월, 그는 다시 설악의 표범골을 찾아갔다.
피켈과 아이스 대거와 12치 아이젠만으로 50미터 폭을 15분 만에 뛰듯이 올랐다.
그야말로 한 마리의 날랜 표범이었다.
 
50미터 폭을 단숨에 넘은 그는 곧장 100미터 폭으로 달려갔다.
지난해 열 시간 소요된 100미터 폭을 이번에는 불과 30분 만에 올라섰다. 검은 표범은 설악의 골골을 향해 울부짖었다.
(석주야! 토왕으로 간다. 토왕으로 간다. 토왕폭 위에 너를 위한 작은 케룬을 쌓고 그곳에 피켈을 꽂아주마.)
 
100미터 폭을 30분 만에 오른 그는 너무나 기뻤다.
그것으로 토왕폭 등반에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니, 확신이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후등자는 한 시간 사십 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100미터 폭 등반 중 송준호는 아이젠 밴드가 벗겨졌으나 균형을 잡고 고쳐맸다.
그 일화는 송준호의 이름과 더불어 산악계의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의 장비라면 100미터 폭을 30여분 만에 오를 수 있는 산쟁이가 드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70년대 초의 긴 피켈과 아이스 대거, 거기다 모래내 금강의 12치 아이젠을 주고 오르라면 등반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8 1972년 12월 30일, 맑고 바람이 센 날이었다.
기온은 영하 10도 안팎으로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오전 9시 잦은바위골로도 불리는 외설악 표범골의 비박지를 출발한 송준호는 설악동을 거쳐 11시경 토왕골 들목의 비룡산장에 도착했다.
 
토왕성 폭포 하단을 우회해 중단의 완경사 부분에서 우측의 설벽으로 나아갔다.
상태가 안 좋아 아이젠 없이 피켈만 들고 상단 스타트 지점을 관찰할 수 있는 곳까지 전진했다.
정찰을 마치고 중단의 집목지대에 장비를 남겨두었다. 오후 2시 30분 하산하여 오후 5시 비룡산장으로 되돌아왔다.
 
이날 저녁 요델 산악회의 선배인 서울 백인섭 씨에게 토왕폭 상태가 빙벽등반하기에 최적이니 빨리 내려오라는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피켈, 아이젠, 아이스 하켄 지참, 31일 비행기편으로 오기 바람. 준호.'
 
이튿날, 날씨는 맑고 바람은 여전히 강했다. 날씨는 조금 풀려 영하 3도.
새벽 3시에 일어나 설악동으로 가서 백인섭 씨와 같은 산악회 후배인 박경립 씨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요델 산악회에서는 72년 표범골 등반, 그리고 그 다음해 겨울에 토왕폭 등반을 계획하고 있었다.)
 
11시 30분 비선대에서 일행 중 나머지 7명과 합류하여 용소골 40미터 폭 폭포에서 빙벽훈련을 마친 후 오후 6시 30분 양폭산장으로 갔다.
이날 저녁 요델 회원 정일주 씨에게 토왕성 빙벽등반의 촬영 및 기록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고 토왕폭 단독등반을 결심했다.
 
1973년 새해 아침 날씨 역시 맑았다.
기온은 영하 8도. 송준호와 지원조 두 명은 10시 30분 양폭산장을 출발해 오후 1시 30분 비룡폭포에 도착했다.
양초와 기타 등반에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러 설악동에 다녀온 후 비룡산장에서 잤다.
이날 밤 송준호는 '석주에게'라는, 이승에서 저 세상으로 띄우는 편지를 썼다.
 
 
잘 있었니. 그동안 나는 안정성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1년 당겨 바로 내일 벽과의 감격적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네. 아니면 자네 품으로…
등반 날 나를 도와줄 S 상대 O.B인 J와 P 두 악우를 소개하겠네(노루목에서). 기억해두고 깊이깊이 사귀어보고 싶은 두 사람일세.
지기(知己)도 아닌데 나를 support 해준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닐세.
 
석주도 고마워할 거야. 현재 마음의 동요 없이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전진, 용감한 후퇴,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한 스텝 한 스텝 가까워진다는 것은 표현하기 어려운 보람이네.
 
나는 확신한다. 아직 너는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을…
석주가 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열심히 한 발 한 발 힘차게 오를 것이다.
 
정상에서 대화를! 노루목에서 일 배 하세!
좁은 지면 메우기보다는 서로 힘찬 격려로써 서로를 지켜주면 좋을 걸세. 용아장성처럼…
후회하지 않을 행동뿐 결코 두려워하지 않겠네.
 
 
나의 맘 한없이 메꾸고 싶지만 주고받을 얘기는 토왕성의 하얀 벽 꼭대기에서! 여유를 가져보세.
1월 1일 설날 이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은 보람일세. 넘기기 싫은 하루였다네.
 
1973년 1월 2일 여전히 맑은 날씨에 기온은 영하 5도,
오전 8시 40분 송준호와 지원조를 포함한 세 명은 비룡산장을 출발했다.
 
등반계획은 상단 40미터 지점의 고드름 기둥까지를 1피치로 잡고 그곳에서 70미터 자일을 고정한 후
스타트 지점의 지원대원으로부터 120미터 자일을 지원받아 등반을 계속하여 두 시간 정도에 끝낸다는 것이었다.
 
이날 속초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고 빙질이 백빙에서 점차 청빙으로 변해가는 상태에서 송준호는 등반을 시작했다.
중식으로는 빵, 잼, 초콜릿, 쇠고기 통조림을 준비하고 간식으로는 꿀, 초콜릿, 껌, 사탕을 마련하여 간식 둘과 중식 하나를 지참했다.
장비는 9미리 자일 70미터와 7미리 굵기의 120미터 자일 두 동, 몽블랑 가이드 제품의 피켈, 헬멧,
모래내 금강 12치 아이젠, 아이스 대거, 록 해머, 카라비너 17개, 래더 2개, 고글, 아이스 하켄 12개, 헤드램프가 전부였다.
 
하단을 우회한 그들은 장비를 놓아두었던 장소에서 30분 가량 휴식을 취했다. 12시 15분 중단의 빙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송준호는 70미터 자일의 한쪽 끝을 몸에 묶고 올랐으며 다른 한쪽 끝은 지원대원이 몸에 묶지 않고 30미터 정도 사려 배낭 위에 얹었다.
 
중단은 30~50도 정도 경사진 빙벽이다.
바로 앞뒤에서 출발한 지원대원은 처음에는 5~6미터 간격으로 따라올라 앞선 송준호와의 간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사가 차츰 급해지면서 간격이 점차 벌어져 송준호가 상단 스타트 지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간격은 35~40미터가 되었다.
지원대원의 손에 감겨 있던 줄은 점점 더 풀려나갔다.
 
지원대원은 경사가 약간 심한 곳을 피해 옆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 순간 지원대원은 밸런스가 깨지면서 '앙카'라고 소리치며 넘어져 미끄러졌다.
그 바람에 지원대원과 연결된 자일로 목을 묶고 있던 송준호도 밑에서 갑작스레 잡아당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께 추락했다.
 
앙카 소리에 놀란 촬영담당 대원은 위를 쳐다보았다.
일부러인 것처럼 자연스레 떨어지는 송준호와 그 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지원대원을 목격했다.
먼저 떨어져 내리던 지원대원은 아이젠이 얼음에 걸리며 방향이 바뀌어져 중단의 완경사가 끝나는 부분에서 설사면 쪽으로 퉁겨 정지했다.
 
송준호는 계속 떨어지며 제동을 시도했다.
얼음이 갈라지는 듯한 찌익찌익 소리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점차 가속도가 붙어 그의 몸은 중단을 완전히 빠져나가 하단으로 떨어져 120여 미터의 허공을 날았다.
그대로 모든 것은 끝났다.
 
중단과 하단의 접합지점 빙벽 위에 그가 최후의 제동을 시도하며 휘두른 피켈은 얼음을 뚫고 빙벽에 굳게 박혀 있었다.
석주와의 약속대로…
 
 
9 그의 토왕폭 등반은 무모한 것이었을까?
토왕폭은 그후 국내의 유수한 산악회의 맹렬 산쟁이로부터 끈질긴 도전을 받다가 1977년 크로니 산악회의 박영배 씨에 의해 초등되었다.
 
박영배 씨는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은 바트 혹(Wart Hog)이라는 아이스 하켄 사용에 있었다고 솔직히 토로했다.
바트 혹은 그후 토왕폭 등반에 필수로 등장한, 설치와 회수가 간편한 아이스 하켄이다.
그는 상단에만도 6박 7일이라는 긴 시간의 오름짓 끝에 등반에 성공했다.
그간 70여 회의 하켄을 설치했다. 그에 비해 송준호는 기껏 12개의 하켄을 준비했고 등반 소요시간을 두 시간으로 잡았다.
 
그리고 73년 당시는 프론트 포인팅 기술이 제대로 도입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직으로 일어선 빙벽은 등반 가능성 자체를 의심받고 있었다.
 
77년 초등 이후 토왕폭은 거듭 재등되었지만 송준호 이후 단독등반은 80년대 초까지 시도조차 한 사람이 없다.
이처럼 좋아진 장비, 기술변화와 등반시간을 비교해보면 송준호는 엄청난 무리를 감행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피켈과 아이스 대거에 의지한 채 한국 최대의 빙벽을 두 시간 만에 해치우려 했다니 말이다.
 
오랫동안 자일 파트너였던 나경봉 씨는 송준호가 무섭도록 차갑고 이지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억한다.
10여 년간의 산행활동 중 송준호는 한 번도 미끄러지거나 추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건 확률적으로 거의 제로에 가깝도록 어려운 일이다.
 
그가 얼마나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나 하는 것은 사용한 장비나 글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등반 때마다 운행계획과 실제 등반과정을 자필로 남겼다. 그 차분한 글씨에서 표범 송준호를 연상하기란 정말 힘들다.
또 100미터 폭 등반 시 12치 아이젠의 프론트가 박히는 형태와 자세를 촬영해서 가장 균형잡힌 자세를 찾아냈다.
 
그러한 치밀성은 산행일지에 더욱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산행에 여러 가지 원칙을 정해두고 있었다.
그 원칙은 종주에서부터 릿지, 암벽, 빙벽에 이르기까지 등반의 모든 분야에 걸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암.빙벽에서 각 개인의 빌레이 능력을 Body, Hip, Hand Belay로 나누고 다시 One, Two, Three Karabiner,
즉 자일이 통과한 비너의 개수에 따라 분류하고 거기에 자일이 확보자용 카라비너에 감긴 횟수에 따른 구분까지 한 확보 교본을 작성해두고 있었다.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피우던 골초가 산행을 위해 절연했으며 금주까지 단행했다.
군생활 중에도 그는 산행을 계속했다. 위령재에 찾아온 그의 부대친구들에 의하면, 재경부대에 근무하게 된 덕도 있지만 산행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신체단련을 하는 그의 산행의지가 지휘관을 비롯한 동료들의 마음을 움직여 산행을 가능하도록 힘써주었다고 한다.
 
69년 설악산 석주길 개척등반, 70년 설악산 용아장성 등반, 인천 청악산 오버행 인공등반,
71년 설악산 표범골 빙벽등반, 72년 1월 용아장성 동계초등 등이 사병으로서의 군복무 시절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체질적인 단독등반가였다.
서울 근교 암장과 설악산에서 많은 단독등반을 경험했다.
토왕폭 단독등반 행위는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 등반 시 그는 매우 적은 양의 장비를 사용했다. 하켄 열 개가 소용되는 코스를 그는 하켄 두세 개로 해치웠다.
이러한 등반방식은 요즈음의 등반조류로 봐서는 바보짓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공적인 장비를 적게 사용하는 것이 지배적인 미덕이었던 그 당시의 흐름에 그는 매우 충실했을 뿐이다.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확보지점과 장비와 시간을 사용한다.
그 확보점의 소요 수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며,
스스로의 등반 리듬에 의해 그 수를 줄여나가는 것이 진보적인 등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토왕성에서 송준호가 택한 장비와 예정 등반시간은 그에게 최선의 것이지 무리라 볼 수 없다.
 
그가 무리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후에 토왕폭을 등반한 후배들에 의해 입증된다.
70년대 말부터 겨울 표범골의 100미터 폭을 30분 만에 오른 산쟁이들이 나타났으며,
80년 겨울에는 두 명이 토왕폭 상단을 일곱 시간 만에 올랐다.
 
이 팀의 경우 한 사람당 세 시간 반이 소요된 것인데,
두 사람이 오르기 위한 확보시간을 제한다면 한사람이 오르는 데 두 시간 정도가 소용된 셈이다.
그 두 시간은 바로 송준호가 꿈꾸던 시간과 일치한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당시의 장비로 요즈음의 최신 장비를 갖춘 클라이머에 맞먹는 등반력을 가진 그의 능력이다.
그는 7~8년 정도 앞선 사람이었다.
 
'얼음 송곳'이라는 뜻의 아이스 대거는 빙벽이 아니라 설벽용으로 제작된 장비다.
빙벽용으로 국내에 잘못 인식된 아이스 대거를 쥐고 토왕폭 등반을 시도한 것이 화를 부른 게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지만,
잦은바위골의 100미터 폭에서 눈에 꽂는 장비를 얼음에 꽂으며 성공리에 올라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토왕폭에서의 죽음은 그 스스로나, 미끄러졌던 지원조의 잘못 때문은 아니었다.
 
송준호보다 더 높고 험한 산을 오른 사람은 많다.
하지만 그처럼 산행의 동기가 오직 산이었던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가 진정한 산쟁이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영원한 삶의 순례자로서 언제나 새로운 산 앞에 다시 서야 하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산쟁이의 숙명을 받아들이다가
그는 평소 즐겨 쓰던 제2의 선이라는, 현실에서 이상으로 이어지는 초월의지의 선을 타고 산쟁이답게 간 것이다.
【작성】 전두성의 산과 삶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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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