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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니스트 비망록-전위적 클라이머, 산노래로 살아온 Alpinist

[취재기사] mountain 2013년 8월호
법랍 40년 가사장삼을 벗듯, 산력 40년 산을 내려놓는다.
곽정혜 기자 사진 양계탁
 
이 땅에 산악활동이 시작되던 때부터 산꾼들은 삼삼오오 모여든 야영장에서, 산에서 내려와 참새방앗간처럼 모여든 선술집에서,
산악계의 크고 작은 행사장에서 산노래를 부르며 결속을 다지고 그들만의 정서를 나누어왔다.
 
현재 산악계에는 저마다의 음색과 감정을 실어 산노래를 전문적으로 부르는 고수들이 몇 있는데,
그중 전두성씨(61세 어센트산악회)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누구든 금세 산노래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고 만다. 듣는 이들의 넋을 잃게 만든다는 로렐라이 소녀처럼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산사람들을 홀리는 모습 때문에, 그의 노래하는 모습은 간혹 ‘신들린 무당’에 비유되기도 한다.
 
<우쿨렐레는 전두성씨에게 청바지와 함께 양대 트레이드 마크다.
그는 산에 처음 다니던 시절부터 산노래를 부르고 전파해왔다.>
 
 
산노래 안에는 알피니스트의 개척정신이 있다
 
미국에 ‘멀고 먼 고향 앨라배마에서 벤조 하나 달랑 메고 루이지애나로 애인을 만나러 간’ 포스터(Foster, Stephen Collins)가 있다면, 한국 산악계에는 ‘우쿨렐레를 메고 마음속의 영원한 고향인 산을 찾아간’ 전두성이 있다고 감히 말하겠다. 풍부한 시정(詩情)이 깃든 가사와 소박한 선율로 누구나 부르기 쉬운 노래를 많이 지어 ‘미국 민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포스터에 비해 자작곡이 없는 흠이 있지만, 국내의 산노래를 연구 및 정리하고 평생을 바쳐 보급해온 전씨 또한 ‘산노래 전도사’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산쟁이들의 정서는 곧 저 산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의 온갖 희로애락이 거기에 있으니, 산이 음악의 소재로 등장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러니 정서가 메마른 사람은 산에 오를 준비가 덜 된 걸로 봐도 무방하지요.”
 
그는 배낭에 고이 챙겨온,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우쿨렐레로 짤막짤막한 연주를 해가며 한참동안 산노래 찬양론을 펼쳤다. 인터뷰를 하던 딱딱한 공기는 어느새 작은 음악회로 바뀌어 부드럽게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기자도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연주에 장단 맞춰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풀린 정신줄을 되감는 데 한참이 걸렸다.
 
전씨의 설명에 따르면, 통칭 ‘산노래’라고 불리는 노래들은 이 땅에 근대등산이 싹트던 일제강점기 때부터 불려왔다.
“원로 산악인 선배들께 여쭈어보니, 산에서 ‘개나리고개’라는 곡을 즐겨 불렀다고 해요.
당시에는 북한산을 가려면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미아리고개와 삼양동 언덕바지를 거쳐야 했는데,
그 고개의 이름이 개나리고개였답니다. 거길 넘으며 흥얼거리던 노래를 산에서 다함께 부르다가 산노래로 정착하게 된 거죠.”
이후 경기고산악부 출신의 양천종씨가 최초의 창작곡인 ‘산으로 또 산으로’와 ‘스키어의 노래’를 발표했고, 당시 대한스키협회가 '스키어의 노래’를 공식 회가로 지정하며 '스키어의 노래’는 산노래로서의 입지가 다소 모호해지기도 했다.
 
1965년 전석환씨가 한국YMCA를 통해 건전한 대중가요 보급 및 확산을 시작하면서 그 문화가 산악계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반까지 ‘클라이머의 기쁨’ ‘저 산정에-아득가’ ‘숨은벽찬가’(이상 백경호) ‘설악가’ ‘즐거운 산행길’(이정훈) ‘잘있거라 설악아’(김태호) 등 50여편의 산노래가 차례로 발표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요들러이기도 한 가수 김홍철씨가 요들 음반으로 방송활동도 하면서 산노래가 부흥기를 맞았다. 당시에 발표된 주옥같은 곡들은 지금까지도 산악인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
 
<“불가에서는 법랍 40년이면 가사장삼을 반납한다는 말을 듣고
나도 산에 40년 다니면 그만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하는 전두성씨. 요즘은 그저 칩거 중이다.>
 
 
산노래 최전성기인 1969년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다니기 시작한 전두성씨에게, 산노래는 어쩌면 신이 그의 인생에서 만날 것을 미리 정해놓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처음부터 그는 산노래에 자연스레 녹아들어갔다. 또 하나 그의 운명인 우쿨렐레와의 만남은 이듬해인 1970년에 이루어졌다.
 
“어느 날 학교 대신 선인봉에 올라갔는데, 할머니 가게에서 만난 김태호(마운틴빌라) 선배의 손에 신기한 악기가 들려진 걸 봤어요. 앙증맞은 기타처럼 생겼는데, 이름을 물어보니 ‘우쿨렐레’라고 했어요.”
그 악기가 너무나 탐이 난 그는 산에서 내려온 뒤 악기상가를 모두 뒤져 당시 돈으로 4백원을 주고 그것을 샀다. 이후 우쿨렐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탱탱한 악기 줄이 늘어져 엿가락처럼 휠 때까지’ 그와 백년해로를 하고 있는 조강지처가 되었다.
 
전씨는 1980년대 중반부터 코오롱등산학교 강사로 활동했는데, 저녁 강의 때 졸음과 싸우는 교육생들의 기분전환을 위해 틈틈이 산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이것이 너무 호응이 좋아 등산학교의 정규과목이 되었고, 이에 그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가르치자’는 생각으로 산노래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산노래 가사와 악보를 채록하고 컴퓨터의 음악 소프트웨어로 일일이 확인하는 데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노력의 결실을 1993년에 <노래모음 '산이야기'>라는 책으로 발간했지만, 당시 20부밖에 찍지 않아 현재 거의 남은 것이 없다.
 
<전두성(오른쪽 두 번째)씨는 그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산노래들을 악보로 옮기는 일을 한동안 해왔다.
어느 산노래 공연 때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구인모, 손재식씨>
 
 
“‘산’이란 글자만 들어간다고 다 산노래가 아니에요.
그때의 개척 정신을 가진 산사람들이 어울려 부르던 노래이니만큼, 산노래에는 알피니즘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원리원칙에 철저해 ‘독일 병정’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답게, 산노래에 대한 정의 또한 엄격하고 까다롭게 매긴다.
 
천성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까닭인지, 전두성씨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1967년 여름, 고교진학을 위한 입시생의 신분이었던 그는 돌연 배낭을 꾸려 무전여행에 나섰다. 호남선 기차를 타고 목포에 도착한 후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배가 타고 싶어져 무작정 제주도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배에서 만난 대학생 형들을 따라 한라산도 올랐다. 그의 인생에 첫 산행이었다.
 
<토왕성 연장등반 당시 함께한 어센트산악회 회원들과 함께한 전두성씨(왼쪽).
그는 한때 국내 산악계에 이슈가 되었던 전위적인 등반을 했었다.>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힘든 등반하며 ‘알피니즘 정신’ 구현
 
공부를 소홀히 한 탓에 일 년을 꿇은 뒤, 1969년에 중대부고에 입학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산악부에 가입한 것이었다.
중대부고 산악부원은 저절로 어센트산악회 회원이 되었는데, 어센트가 일명 ‘선인파’였던 까닭에 그도 주말이면 어김없이 도봉산으로 달려갔다. 방학 기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설악산에서 지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정신을 못 차리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산에 다니는 걸 간섭 않겠다”고 했다.
 
1972년 광운공대에 입학하며 어머니의 소원풀이를 해드린 후 그는 더욱 거칠 것 없이 산에 다녔다. 대학 1학년 때 설악산 백운동 일원의 개척등반에 참가하고, 이듬해엔 서북릉~백운동계곡~용아장성~화채봉을 연결해 등반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어센트산악회의 리더 자격으로 동계 천화대 초등을 이뤄냈다. 1977년에는 천화대~1275봉~잦은바위골 연장등반을 해내기도 했다.
 
“알피니즘이 태동한 알프스에는 만년설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겨울 외에는 그런 극한의 환경이 없어요.
주어진 환경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산행을 함으로써 나름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행위를 대체한 거였지요.”
 
그렇게 천하에 겁날 것이 없던 그도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느낀 적이 있다.
1981년 어센트산악회 대장으로 설악산 토왕폭과 우벽 연장등반을 이끌던 중 막판에 사고가 난 것.
당시 고교생이던 신동우씨(한국산악회)가 후등을 하다가 60여 미터를 추락하는 바람에 선등자였던 김명춘씨가 토왕폭 정상에서 조난되었다. 다행히 신씨는 자력으로 내려올 정도로 큰 부상을 입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구조되기 전까지 그곳에서 9시간을 보낸 김씨는 심한 동상으로 결국 발가락 다섯 개를 절단해야 했다. 전씨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김씨의 병원비가 당시 돈으로 3백만 원 나왔는데, 돈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장비를 몽땅 팔고도 석 달 넘도록 월급의 절반 이상을 보탰다. 그런 그에게 “오버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고경위야 어쨌든 팀의 리더는 나니까,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 때로는 사람에 대한 회의가 생길 때로 있었죠. 리더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란 걸 그때 깨달았어요.”
 
<1978년 안나푸르나4봉 등반을 마치고 돌아온 전두성씨. 당시 막내대원으로 참가한 첫 히말라야 등반이었다.>
 
 
하지만 일찍 산에 다닌 탓에 그는 이후로도 늘 무리를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90년 가을, 대장으로선 처음이자 마지막 히말라야행이던 안나푸르나(8091m) 남벽으로 원정을 떠났다.
앞서 전씨는 대학 4학년생이던 1978년에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4봉 원정대에 막내로 참가한 바 있다. 당시 지원조이자 2차 공격조였던 그는 해발 7000m의 3캠프까지 진출했었다. 선배산악인의 권유와 안나푸르나4봉의 설욕을 위해 호기롭게 안나푸르나 남벽에 출사표를 던졌지만, 주변상황이 도와주지 않았다. 위험천만한 눈사태로 뚫어놓은 루트와 장비가 폭설에 잠기고, 현지 고용인들과의 갈등 때문에 점점 피로감이 커졌다. 또한 원정기간이 늘어날수록 하루가 다르게 대원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결국 그는 4캠프를 목전에 둔 해발 6800m 지점에서 등반을 접기로 결정했다.
 
 
사랑으로 모두가 함께 하는 세상을 꿈꾼다
 
등정에 성공하지 못한 대부분의 원정대가 그러하듯, 원정이 끝난 뒤에도 대원들 간에 갈등과 반목이 몇 년간 이어졌다.
그것을 지켜보는 그의 마음은 괴로웠지만, 그 또한 성장을 위해 겪어야할 과정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더욱 성장하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는 걸,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1990년 안나푸르나 원정을 떠나기 전, 그는 8년간 일하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고 갔다.
대학을 졸업하고 1983부터 삼보컴퓨터에서 일해 중견간부에 올라있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밥줄을 안나푸르나 입산허가서와 맞바꾸었다.
 
“그때는 무엇보다 등반에 대한 욕심이 컸고, 또 내 직업이 나름 전문직이라서 다시 취직할 수 있을 거라는 자만도 있었어요.
하지만 역시 인생은 내 생각대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더군요.”
 
이후 전두성씨는 일반 직장 대신 산악관련단체에서 행정적인 일을 맡아 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한국산악회 이사 겸 안전대책위원장을 지냈으며,
동시에 1992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겸 사무국장도 맡아 일했다.
 
<마라토너 황영조씨에게 하강법을 교육 중인 전두성씨.
전씨는 1970년대 중반부터 여러 등산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가해왔다.>
 
 
그는 또한 1976년부터 여러 사설 등산학교와 시설에서 산악 지도자로 활동한 것을 인정받아 1998년부터 5년 여간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개설 및 운영을 책임져왔다. 산악회로부터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않았지만, 등산학교는 매회 입학생 정원을 꽉꽉 채웠고, 다양하고 수준 높은 프로그램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2002년에 한국산악회가 산림청과의 협약으로 등산학교를 개편할 때, 그는 거의 맨몸으로 쫓겨나다시피 등산학교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당시엔 무척 화가 났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 또한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성장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덕분에 ‘열린캠프’가 생겨났으니, 결과적으론 오히려 더 나아진 셈이죠.”
 
그는 2003년부터
‘산으로 자연을 알고, 등반으로 자아를 구현하며,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깨닫는’것을 교훈(校訓)으로 하는
열린캠프 등산학교(cafe.naver.com/frcamp)를 만들어 지난해까지 운영했다.
 
등산학교에서는 ‘안전한 등산을 위해 미리 계획하고 철저히 실행했으며, 다양한 등산문화 활동을 즐겁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제 열린캠프는 인수와 선인에서 새벽에 가장 일찍 출발하는 팀으로 유명했는데,
전씨는 그 이유를 “안전한 등반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푸릇한 시절 우쿨렐레를 들고 도봉산에 오른 전두성씨>
 
 
“설산에서 해가 진다는 건 곧 위험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새벽 일찍부터 운행에 나서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날의 운행을 마쳐야 하죠.
모든 등반활동은 만년설이 쌓인 흰산에서의 활동을 전제로 하니, 국내에서도 그에 맞게 운행하는 것을 습관화해야 합니다.”
역시나 ‘독일 병정’다운 그의 말.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반전은 있었다.
 
그는 등산학교 운영방침을
‘제시하되 강요하지 않으며,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고, 사랑으로 온 힘을 다해 모두가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데’ 두고,
실제로도 그렇게 운영해왔다.
 
“등산학교는 산의 위험을 일깨워주고, 교육생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육도 자유롭게 이루어졌고, 졸업 후에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그러니 이름이 ‘열린캠프’죠.”
 
전두성씨는 처음 산에 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60세까지만 산에 다니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서 60세가 되던 지난 해 2월에 등산학교에 관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현재 칩거 중이다.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지만, 만약 활동을 재개한다면 어려운 산악인들을 돕기 위한 수익산업을 해볼 작정이다.
 
“40년이 넘게 산에 다니며 주위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정작 저는 많은 도움을 준 게 없는 것 같아요.
할 수 있다면, 앞으로는 ‘돈 되는 일’을 좀 해서 주위에 어려운 산악인들을 돕고 싶습니다.”
 
전두성씨는 가장 좋아하는 산노래를 ‘설악가’라고 답했다.
40여 년 흰 띠 두른 능선길 따라 달빛을 걷고 있는 산꾼의 머리칼에도 흰 눈이 수북이 쌓여가고 있었다. ⓜ
 
전두성
≫ 1969년 중대부고 산악회, 어센트산악회 입회
≫ 1972년 광운대학 산악부 입회
≫ 1972년 설악산 백운동 일원 개척 등반
≫ 1974년 동계 천화대 개척 등반
≫ 1978년 한국산악회 안나푸르나4봉 원정대 참가
≫ 1981년 설악산 토왕성폭포 및 우벽 연장 등반
≫ 1990년 안나푸르나1봉 남벽 원정대장
≫ 1992~1998년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겸 사무국장 역임
≫ 1998~2002년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운영
≫ 2003~2012년 열린캠프 등산학교 개설 및 운영
【작성】 전두성의 산과 삶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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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5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