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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바람처럼 스쳐간…
전두성의 산과 삶의 자취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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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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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雪嶽山) # 토왕성 # 히말라야 등반
【여행】
(2018.06.13. 00:48) 
◈ 토왕의 추억(2)
75~76년 겨울, 군대생활을 7개월쯤 남겨두고 있을 때였다.
동국대학교 산악부 팀이 토왕성 하단 빙폭을 등정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달 이상을 공략 끝에 기어이 하단을 오른 것이다.
염원하던 목표를 빼앗긴 듯한 느낌에 무척 서운하였지만, 아직 상단이 남아있으니 하는 마음에 자신을 위로했다.
 
 
8월에 군 복무를 마친 나는 복학과 함께 등반활동에 열중하였다.
하지만 그해 말,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대원으로 선발되면서 토왕성 등반에 대한 계획은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뉴스를 들었다. 77년 겨울 1월에 크로니 산악회가 토왕성 빙폭 상, 하단을 모두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최소한 몇 년은 더 걸릴 것으로 알았던 토왕성 상, 하단 첫 등정이 마침내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78년 히말라야 등반을 마치고 카트만두에서 귀국을 기다릴 때였다.
등반장비 시장에서 어슬렁거리던 나는 어느 허름한 장비점 앞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장비점 구석에 파이프 스크루가 한 무더기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앗! 저거다!
토왕성 등반에 대한 미련이 있던 내게 당시 최신형 빙벽 확보물인 파이프 스크루는 마치 복음처럼 다가왔다.
당장 값을 물어보고 20여 개쯤 되는 파이프 스크류를 모두 쓸어 담았다.
 
 
귀국 후 나는 어떻게 하면 토왕성 등반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몰두하였다.
그때까지 토왕성 빙폭 등반은 우측 등행로로 상단 등반에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고 보급하는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하단과 상단을 각각 별개의 루트로 등반하는 방식이었다.
 
측면 지원 없이 등반한 루트로 모든 물자를 올린다면 좀 더 가치 있는 등반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에 한술 더하여 우측 암벽등반을 함께 연장한다면…,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은 환희가 다가왔다.
 
 
80~81년 겨울, 나는 그동안 훈련한 후배들과 토왕성 빙, 암벽 700m 연장등반에 대한 구체적 계획을 만들었다.
10년 전과는 달리 장비도 기술도 많이 발전하였다.
아이스하켄이라 불리던 나이프 브레이드 타입의 확보물은 와트 훅이라는 신형 확보물로 대치되었고
우리에겐 파이프 스크루라는 비장의 무기도 있다.
허밍버드사에서 개발한 튜브 피크 타입의 최신 빙벽 장비도(아이스 해머) 보유하였고,
크램폰도 독수리 부리 같은 프런트가 달린 12치 크램폰이다.
로프도 80m 길이에다 대원의 경험과 능력도 월등하였다.
 
'이규남, 이정열, 김명춘, 이정환, 신동우'가 그때의 대원들이다.
특히 이정열, 김명춘 대원은 26~7세의 나이로 암벽등반에서는 당시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을 갖춘 대원들이었다.
 
 
81년 1월 1일, 대원들을 먼저 출발시켜 베이스캠프를 건설시키고 나는 닷새 후에 토왕성 베이스캠프로 합류하였다.
내가 합류하던 날 대원들은 하단 등반을 마치고 로프를 고정하였으며
일부 대원은 중단 테라스에서 비박하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징조가 불행의 시작을 알려왔다.
베스트 대원인 이정열 님은 그때 방위로 복무 중이었다.
등반 욕심이 앞서 부대를 이탈하고 팀에 합류하였는데 탈영으로 구속하겠다는 연락이 왔던 것이다.
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이정열 대원을 억지로 하산시키고 남은 대원으로 등반을 계속하였다.
하단 등반로를 개척한 지 사흘 만에 중단에 캠프를 만들고 물자수송을 마칠 수 있었다.
 
 
상단 루트를 살피고 등반을 시작하던 날, 선등 대원 편성을 하던 중에 신동우 대원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생으로 팀에 합류한 신동우 대원을 보며 10년 전 내가 처음 토왕성에 발을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그래, 동우에게 기회를 주자.
 
이렇게 생각한 나는 김명춘 대원을 선등으로, 신동우 대원을 확보자로 상단 등반조를 편성하였다.
아침 7시에 시작한 등반은 밤 11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선등자를 상단 정상에 올릴 수 있었다.
확보자의 랜턴 불빛이 상단 수직 벽을 넘어가고
가장 까다로운 구간 등반이 해결되었다고 안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낙빙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뿔싸! 고정한 로프를 따라 어센더로 상단을 오르던 확보자 신동우 대원이 추락한 것이다.
새벽 한 시, 추락한 대원은 천행으로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로프에 매달려 있다. 소리쳐 확인하니 의식이 있었다.
로프에 매달린 환경에서 몸 상태를 살피던 신동우 대원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며 나를 안심시킨다.
즉시 비상상태로 돌입하여 추락한 신동우 대원의 구조를 준비하였다.
 
또한, 상단 등반을 마치고 고립된 김명춘 대원을 구조하고자
미리 정찰한 상단 우회 등반로로 이규남, 이정환 대원을 올려보냈다.
 
 
상단 등반 시작 지점으로 접근하여 신동우 대원의 상태를 확인하니 뜻밖에 양호하다.
지시대로 로프 끝 부분을 묶고 오르다 추락했기에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고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추락 거리는 약 60m가량으로 추정되었다. 추락을 멈춘 지점에는 상단을 오르며 고정해둔 로프가 걸려있었다.
신동우 대원은 묶여있는 로프 매듭을 칼로 끊고 고정 로프를 이용하여 하강하였다.
 
이젠 김명춘 대원이 걱정이다.
기온은 영하 20도, 등반하며 피로하고 젓은 몸으로 체감온도는 영하 30도가 넘을 텐데…, 무사히 살아올 수 있을까?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구조대원의 연락을 기다린다. 온갖 상념이 스쳐간다.
 
 
오전 10시, 상단 우회로에서 소리가 들린다.
올려보낸 두 대원이 김명춘 대원을 부축하며 하산하고 있다. 한걸음에 달려가 김명춘 대원을 얼싸안았다.
텐트에 앉힌 후 발을 살폈다. 아니나다를까 발가락은 새파란 색깔을 띠고 차갑게 얼어있었다.
체온과 비슷한 더운물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명춘이의 발가락을 입에 물고 조금이라도 동상 부위를 녹여보려 애를 썼다.
 
어느 정도 조처한 후, 부상자는 하산시키기로 하고 잔류 대원으로 연장등반을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다음날 등반을 다시 시도했으나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고정해 둔 로프에 물이 흘러 모두 얼어있는 것이다.
남은 장비와 대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등반이 안 된다.
설상가상으로 속초로 내려보낸 김명춘 대원이 다시 캠프로 올라왔다.
김명춘 대원은 자신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도 모른 채 캠프에서 등반을 지켜보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의논 끝에 김명춘 대원을 빨리 서울로 후송하고 연장등반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김명춘 대원을 다시 서울로 후송하고 남은 대원은 장비 회수를 시작하였다.
토왕성 상단을 우회로로 올라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고정 로프와 확보 장비를 회수하고자 하였으나 작업이 무척 어렵다.
사흘쯤 지나자 빙벽에 고정해 둔 로프는 벌써 50cm 깊이로 얼음을 파고들었다.
피켈로 얼음을 깨며 빙벽에 묻힌 로프를 조금씩 파 내려가자
신동우 대원이 60여 m를 추락했는데도 로프가 끊어지지 않은 원인이 하나둘 나타난다.
추락 충격에 부러진 나무가지(여분의 로프를 사려 묶어두었던), 끊어진 푸르지크 매듭 등…
 
폭설이 내리기 시작하던 날, 나는 토왕성 상단 꼭대기에서 로프에 매달려 눈보라와 마주치고 있었다.
협곡 기류의 영향으로 눈은 밑에서 위쪽으로 휘몰아친다.
세상은 온통 눈보라로 뒤덮여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그래 이 정도로 만족하자.
그까짓 장비에 연연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로프 아래쪽에 매달린 후배를 올리고 작업 중단을 지시한다.
중단에 설치한 전진 캠프로 돌아오니 눈은 그쳤지만, 캠프는 폭설에 묻혀 흔적이 없었다.
눈을 파헤치고 텐트를 정비한다.
 
하산했던 대원이 산악회 전병구 선배의 메모를 들고 올라왔다. 격려의 메시지다.
깊이 쌓인 눈이 탐스러워 이정환 대원을 시켜 설동을 파고 들어앉았다. 등반에 대한 만감이 교차한다.
다음날 나는 캠프 철수를 대원에게 맡기고 하산하였다.
대원들은 토왕성 상단 출발점 고정 로프에 이렇게 메모를 달아두었다.
"이 자일은 어센트 산악회가 토왕폭 등반에 사용하고 회수하지 못한 것임. 해빙기에 회수할 예정이니 그냥 두기 바람."
 
 
서울로 돌아온 후 나는 등반 마무리에 몇 달을 시달려야 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대원의 부상이었다.
가난한 후배의 치료를 위해 모아두었던 등산 장비를 모두 팔아야 했으며,
선, 후배의 후원을 받고자 동분서주하며 200만 원 상당의 부족한 병원비를 마련하였다.
결국, 김명춘 대원은 두 달간의 입원 끝에 엄지발가락을 포함하여 5개의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김명춘, 이정열 후배는 그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L.A에서 살고 있다.
14~5년쯤 전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두 후배와 마주할 수 있었다.
나를 껴안고 눈물 글썽거리는 후배와 그날은 참 많이도 술을 마셨다.
요즈음도 가끔 미국에서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는 후배에게 나는 매번 묻고 또 물어본다. 발가락 괜찮니?
 
 
추락-등반일지(신동우) 【연결】http://cafe.naver.com/frcamp/989
등정-등반일지(김명춘) 【연결】http://cafe.naver.com/frcamp/990
철수-등반일지(이정환) 【연결】http://cafe.naver.com/frcamp/991
 
 
<토왕폭의 사나이들> 박인식 님의 글에서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어센트의 연장등반 계획은 큰 문제점을 제기했다.
그것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루트를 연결한 정도의 더욱 큰 루트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유사성의 오차 한계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가능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모색하게 한 실험적 등반이었다.
 
이러한 연장등반은
1,000m급의 산밖에 없는 우리나라의 자연 지리적인 여건을 극복하려는 산사람들의 초월적 의지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사고로 그 가능성이 제대로 가늠되지는 못했지만,
우리의 산악계는 어센트의 선구적 실험등반으로 하여
1,200m의 거벽이라는 인위적인 등반활동 공간을 관념적으로나마 넓히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자유공간의 확대일 것이다. 하지만 토왕폭의 경우, 상황은 원칙 이상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토왕폭 상단은 두 사람이 빠른 속도로 등반한다 해도 낙수로 인해 후등자의 확보와 유마링은 늘 문제가 된다.
이곳에서는 후등자나 지원조가 공격조보다 훨씬 위험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잦다.
토왕폭에서는 빙벽에 붙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이러한 곳을 통해 등반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기술과 장비로는 분명 난센스다.
그것은 스스로 조난을 부르는 행위가 될 위험마저 있다.
 
하지만 연장등반의 겨우 그 지원방식은 어센트로서 택한 극지법을 필수로 요구한다.
공격 루트만 통해 지원과 철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연장등반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연장등반의 요구조건과 토왕성의 등반 조건은 서로 모순된다.
이러한 등반의 모순성은 산사람들이 안은 영원한 숙제의 하나일 것이다.
 
빙벽등반을 끝내고 우측 벽으로 계속 연장등반 했을 경우를 가정해 보자.
B.C 바로 옆에서 스타트할 우측 벽에 필요한 사람, 장비, 식량 일체가
토왕성 빙벽을 거친 다음에야 우벽 스타트로 옮겨질 수 있을 것이다.
 
배낭 하나를 바로 앞에 있는 파트너에게 전해주고자
자일이 얼어붙는 320m의 토왕성 빙벽을 올라갔다가 도로 그 빙벽을 내려와야 한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그 조그만 보따리를 허기진 당신의 파트너에게 전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가능할까? 또 빙벽과 좌우 벽을 모두 연결했을 때는 더욱 기막힐 것이다.
등반에서 이러한 곤란함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배낭을 그러한 과정을 밟지 않고 눈앞에 있는 파트너에게 전해준들 호루라기를 불 심판도, 야유를 퍼부을 관중도 없다.
그러한 '곤란함'은 '보다 힘들고 더욱 어렵게' 라는 가치질서의 머메리즘의 토왕폭 연장등반적 변용일 것이다.
 
만약 그 곤란함이 등반자 자신의 내재율에 자연스레 받아질 수만 있다면,
토왕성의 빙벽 위에 좌측 벽을 또 그 위에 우측 벽을 올려놓은 1,200m의 거벽을 우리는 만들어내는 것이다.
빙벽을 제일 아래 두는 것이 불만이라면 취향에 따라 빙벽을 제일 위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알피니즘에 그러한 공간변형의 시대도 올까, 한국 사람이 그 선구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센트의 토왕폭 사나이들은 토왕폭포 소리 같은 한마디를 한국 산악계에 던지고는 총총 토왕골의 산기슭 뒤로 어깨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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